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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진술한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은 증언 내내 울먹이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정인이는 2020년 3월부터 숨지기 전날인 10월 12일까지 이 어린이집에 다녔습니다.
원장은 숨지기 전날 마지막으로 어린이집에 등원한 정인이 상태는 손발이 너무 차갑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고 기억했습니다. 정인이는 온종일 걷지 못하고 밥도 물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날 하원 하는 정인이를 데리러 온 양부 안씨에게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 꼭 병원에 데려가시라고 당부했습니다. 안씨는 “네”라는 대답을 반복할 뿐 정인이의 상태를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인이는 어린이집 하원 후 병원에 가지 못했고, 이튿날 정인이는 사망했습니다. 죽어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겁니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도 증언에 나섰습니다. 양부모의 친딸인 언니는 작년 여름휴가 뒤 곧장 어린이집에 나왔지만, 정인이는 코로나19 때문이라며 두 달이나 결석했다고 합니다. 두 달 뒤 본 정인이의 모습은 너무 말라있었고 피부가 까맣게 변해있었다고 합니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은 정인이가 뭘 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입양모 장씨는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채 병원에 데려간 일만 따졌고, 정인이의 상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날 재판 내내 양부모는 고개를 숙인 채 증언을 들었습니다. 증인신문이 끝나자 수의를 입은 정인이 양모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양부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정인이 사건 3차 재판은 3월 3일로 예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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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라는 직함으로 재직 중인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최근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 “자발적인 성 노동자”라고 규정한 논문을 내놓았습니다. 해당 논문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1~2년 치 선급금을 받고, 돈을 많이 벌어 그만둘 수도 있었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 파문이 확산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는 모습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93)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매듭짓고 싶다고 나섰습니다. 분홍색 한복을 입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할머니는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에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인정과 사죄를 받아야 한다”며 “국제법으로 일본의 죄를 밝혀달라”고 우리 정부에 호소했습니다.
국제법학계에서는 위안부 ICJ 회부 문제를 놓고 ‘잃을 게 더 많다’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일본이 제소할 때 깊이 있는 고민과 철저한 준비 하에 필요하다면 한국이 같이 응소하는 것을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본 사건을 가지고 갈 이유는 없다는 게 중론으로 파악됩니다. 피해 할머니들이 본질적인 요구사항인 일본의 자발적인 책임 인정과 사죄가 ICJ에 넘겨진다고 해도 보장하기 어렵고, 그동안 위안부 운동에서 이뤄온 성과마저 모두 잃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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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발인식과 노제, 영결식이 19일 엄수됐습니다. 유족을 비롯해 수백여명의 추모객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어른인 백 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통 장례형식으로 함께했습니다.
유족과 추모객은 백 소장의 뜻을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백 소장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한 문정현 신부는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그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했습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뒤 각각 옥살이했습니다. 이후 1986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힘써왔습니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저서를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원작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