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실패하면 반성문'..신약개발 가로막는 경직된 조직문화

국산신약 대부분 기존 약과 유사제품..상업성 저하
글로벌 시장이 원하는 신약 개발에 집중
실패 문책하는 경직된 조직문화 개선 필요성
  • 등록 2015-11-13 오전 7:33:46

    수정 2015-11-13 오전 9:15:16

[이데일리 천승현 기자] 전문가들은 제약사들이 단지 신약 개발 건수에 만족하기보다는 글로벌 시장에서 팔릴만한 제품 발굴을 위한 ‘옥석 가르기’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오너들의 경직된 경영이 R&D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패 보고 못하는 경직된 조직문화’ 신약 개발 그르쳐

한미약품(128940)은 2013년 C형간염치료제의 임상2상시험을 진행하다 돌연 연구중단 결정을 내렸다.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가 당시 C형간염치료제 ‘하보니’를 내놓자 개발 중인 제품의 상업성이 떨어진다고 판단, 백기를 들었다.

신약을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한 업체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에 반해 상당수 국내제약사들은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좀처럼 형성돼있지 않다.

한 국내제약사의 개발본부장은 “제약사들은 보수적인 조직 문화 특성상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거액을 투입한 개발 과제가 실패라도 하면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질책하는 등 실무자들에 책임을 떠 넘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고 꼬집었다.

일부 업체의 경우 이미 내놓은 신약이 상업성이 떨어지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거액을 들여 마케팅을 지속하기도 한다. 신약을 복용하는 환자가 없어 허가 당시 내걸었던 조건부 임상시험 건수를 채우지 못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임상시험 기간만 연장하면서 허가증을 유지하는 업체도 있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이미 판매 중인 유사 제품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 상업성 추락이 예상되는데도 거액의 임상비용을 추가로 투입하며 개발을 고집하는 제약사도 나타나는 실정이다. 오너가 직접 개발한 신약 가치를 시장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글로벌제약사와의 수출 시점을 놓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누구도 오너에게 우리가 만든 신약이 상업적으로 실패했다는 보고를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나서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한미약품의 경우 연구원에 대한 임성기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수출 대박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임 회장은 연구과제의 실패에 대해 단 한번도 문책하지 않았다. 실적이 눈에 보이는 영업사원 뿐만 아니라 연구원들에 대한 포상도 과감하게 진행하고 연구원들의 야근 수당도 두둑히 챙겨주며 지속적인 연구를 독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오너 2·3세의 안이한 경영 방식이 문제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제약사 한 임원은 “한미약품은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의 고집스러운 뚝심으로 성과를 이뤄냈다”면서 “최근에는 부모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일부 오너 2·3세들이 안정된 현실에만 안주하고 과감한 투자를 주저하는 현상도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주상언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장은 “신약을 개발할 때 과감한 투자도 필요하지만 이미 연구가 진행 중인 과제도 중요한 이슈가 발생했을 때에는 중단하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다국적제약사보다 한발 늦은 국산신약 글로벌 경쟁력 저하

사실 국내제약사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신약은 대부분 다국적제약사들이 내놓은 유사 제품보다 뒤늦게 등장했다. 애초부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힘든 제품이 많다는 의미다. 한미약품이 다국적제약사들이 찾는 제품을 만들어 경쟁적으로 러브콜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가장 최근에 허가받은 동아에스티(170900)의 당뇨치료제 ‘슈가논’은 인슐린 분비 호르몬 분해효소(DPP-4)를 저해하는 작용기전을 갖는 ‘DPP-4 억제계열’ 약물인데 이미 국내에만 같은 계열 당뇨치료제는 8개 품목이 발매된 상태다.

지난 2월 허가받은 크리스탈(083790)지노믹스의 ‘아셀렉스’는 콕스-2(COX-2) 억제 계열로 불리는 소염진통제다. 하지만 이미 2006년 화이자가 같은 계열의 ‘쎄레브렉스’를 내놓았고 지난 6월에는 쎄레브렉스의 특허만료로 무려 92개 업체가 쎄레브렉스의 제네릭을 발매했다.

보령제약(003850)의 고혈압약 ‘카나브’, 종근당(185750)의 당뇨약 ‘듀비에’ 등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신약 제품도 이미 유사 제품 또는 효과가 월등한 후속약물의 등장 이후에 발매됐다. 일양약품의 역류성식도염치료제 ‘놀텍’과 백혈병치료제 ‘슈펙트’도 이미 활발하게 판매 중인 다국적제약사의 시장을 뺏어야 하는 처지다. 지난 2013년 허가받은 LG생명과학의 당뇨약 ‘제미글로’가 경쟁 약물보다 5년 가량 늦게 시장에 진입한 것이 빠른 편에 속한다.

국내제약사들의 자금력이 넉넉하지 않아 속도전에 밀리기도 한다. 2009년 허가받은 일양약품의 ‘놀텍’은 개발 기간만 무려 20년 소요됐다. 연 매출 10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 중인 회사 여건상 연구개발비 충당이 쉽지 않아 15년이면 끝나야 할 연구가 5년 지연됐다.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동향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최수진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바이오PD는 “국내제약사가 글로벌제약사가 만들지 못한 새로운 신약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한미약품의 사례와 같이 기존에 없는 신약이 아니더라도 해외시장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 개발에 집중하면 국내제약사의 기술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제품이 나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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