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65% "지금은 장기형 불황"…은행서 돈 안 빌리고 맡기기만

[예금에 몰리는 뭉칫돈]②
10억 초과 계좌잔액 3반기 연속 두자릿수↑
신한銀 대기업 대출 연초 대비 6314억 감소
"정부, 세제 지원 확대로 신사업 유도해야"
  • 등록 2019-12-16 오전 6:00:00

    수정 2019-12-16 오전 6:00:00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이제 은행장이 됐으니, 기업들이 많이 찾아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대출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대기업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무도 저를 찾지 않더군요.”

지난달 29일 이른 아침 서울 중구에 위치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장.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한국수출입은행장 재직 시절(2017년 9월~2019년 8월)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대출 민원이 많을까 봐 내심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기업들이 찾아오질 않아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은 위원장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을 규제뿐 아니라 금융에 대해서도 일본이 압박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이제 기업들이 수출입은행의 대출이 필요하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기업을 찾아갔을 때 돌아온 대답은 ‘필요 없다’는 반응뿐이었다. 그는 “은행도 남는 돈을 마냥 놀릴 수 없으니 (담보가 확실하고 안정적인) 가계대출로 밀어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위원장 “기업들 대출 민원 없어 깜짝”

은 위원장의 토로는 기업들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한국은 일본과 독일처럼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다.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은행의 기업 대출이 줄어들고 은행발(發) 자금 흐름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건 한국 제조업이 고사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주요 시중은행의 거액계좌 급증은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기업들이 적극적인 투자를 선택하는 대신 남은 돈을 은행 정기예금에 넣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은행권 정기예금 중 10억원을 초과하는 거액계좌의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유독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이후 증가율은 각각 12.1%→18.5%→15.8%. 세 반기 연속 두자릿수다. 이는 금융위기 때인 2008년~2009년 즈음 이후 거의 10년 만이다. 같은 기간 거액계좌 수 자체의 증가율도 7~8%로 그 폭이 커지고 있다. 경기 악화에 안전한 예금으로 쏠리는 자금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 돈의 주인은 주로 기업이라는 의미다.

(그래픽=김정훈 기자)
한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기업들이 은행을 돈 빌리는 곳이 아니라 돈을 맡기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고도성장기 때 은행에 몰린 가계 저축이 기업 투자의 밑천이었다면, 지금은 그 반대 상황이 됐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거액계좌가 급증하는 것과 반대로 기업 투자는 감소 추세가 뚜렷하다. 지난해 2분기 이후 건설투자의 증가율은 -2.5%→-8.7%→-5.7%→-7.2%→-3.5%→-3.7%로 여섯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 기간 설비투자도 똑같이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갈수록 은행 대출이 줄고 있다. 신한은행의 대기업대출 잔액은 올해 11월 기준 14조1435억원으로 올해 초(14조7749억원)보다 6314억원 감소했다. KB국민은행(18조2464억원→15조7362억원), 우리은행(16조2316억원), KEB하나은행(15조1928억원→14조6503억원)도 상황은 비슷했다.

금융당국 한 인사는 “가계 소비 증가율이 2% 안팎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과 달리 기업 투자는 갑자기 감소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경기 침체가 심화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진단했다.

내년 경영 계획도 보수적으로 잡는 기업들

문제는 개선 조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소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 C사의 한 고위 인사는 “종합가전업체로 발돋움하려는 장기 계획을 세웠지만, 굵직한 투자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면서 “일단 내년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경영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올해 부진했던 실적을 만회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보안 분야 중소기업 B사 관계자는 “올해는 다행히 실적이 다소 증가했다”면서도 “내년은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우려했다. B사는 미래 새 먹거리로 무인점포 혹은 빌딩관리 분야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대규모 투자 계획은 섣불리 잡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설문을 보면 206개 기업 중 47.4%는 내년 긴축 경영을 할 것이라고 했다. 65% 이상은 최근 경기 상황을 ‘장기형 불황’으로 판단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가의 경영 전망을 나타내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부정적으로 파악됐다. 이번달 대기업의 수출전망 BSI는 88. 올해 6월(94)를 단기 고점으로 하락세다. 같은 기간 내수판매전망 BSI(91→84)도 7포인트 내렸다. 중소기업은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이번달 매출전망 BSI는 72에 머물렀다. 올해 한때(3월) 81까지 올랐다가 줄곧 떨어지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기업의 투자 확충은 경기 회복의 전제 조건”이라며 “신사업 진출을 모색하는 기업의 사업구조 개편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금융·세제 지원 확대 등을 정부는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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