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도 먹어야 진군한다’던 나폴레옹이나 ‘뭘 잘 먹여야지’로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가름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늙은 촌장의 판단에 반기를 드는 건 아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잘 먹어야지. 인생의 온갖 에너지가 거기서부터 나오는 건데. 그런데 말이다. 계급, 군대, 영도력을 다 떠나서 어느 순간부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먹는 것이 미덕인 시대서 먹는 것을 강요하는 시대로 건너뛴 탓이다. TV는 물론이고 대중을 상대하는 모든 매체가 ‘먹자’를 잡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 피해 갈 재간이 없다. 아무리 ‘요리가 부엌을 나와 문화로 들어갔다’고 해도.
‘먹방’서 ‘쿡방’으로 진화한 흐름은 비단 대한민국만을 관통한 건 아닌 듯하다. 어느 외국서 벌어지는 현장을 잠시 엿보자. 여기는 영국. 요리프로그램이 TV편성표를 비집고 나오다 못해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사들이 돌아가면서 잡지나 신문의 인물섹션에 마치 성인(聖人)처럼 등장한다. 그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기이한 파이나 파스타에 상표를 떡하니 붙여 슈퍼마켓에 내다파는 풍경도 흔한 그림. 그 그림을 배경으로 세운 무대에선 유려한 손놀림이 압권인 요리사가 불쇼에 가까운 라이브 요리공연을 펼친다. ‘마스터셰프 라이브’라던가. 그 효과음으로 하이소프라노의 외침이 따라붙고. “정말 대단해. 사랑해요, 세~프!”
▲미식의 시대? 기행의 시대!
음식을 두고 열광하는 ‘쇼’에 본격적으로 딴지를 건 이는 영국의 칼럼니스트다. 하지만 음식에 몰두하는 정황, 셰프가 스타엔터테이너가 되는 세태만을 꼬집는 건 아니다. 저자는 음식이 생존과 나눔보다 과시와 구별짓기의 수단이 된 게 못마땅하다.
음식에 대한 과도한 몰두·집착은 저자에겐 기행이고 퇴폐의 징조다. 그럼에도 책은 음식이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무겁지 않은 성찰로 읽힌다. 영국이니 한국이니 굳이 장소 구분도 필요치 않다. 포크를 젓가락으로 바꾸고 빵 대신 밥, 파스타 대신 국수를 놓으면 국적 따위는 구분도 안 될 터.
▲요리를 할수록 영혼이 허기진다면
어쨌든 요리는 중요하다. 점점 더 중요해진다. 야생의 식재료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던 조리가 이젠 ‘섹시한’ 남자의 필수기능이 됐으니. ‘나도 미식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섬세한 입맛을 시험하는 장도 됐으니. 한국 얘기만은 아니다. 과거 언젠가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정도가 교양수준을 드러낸다고 믿었던 한국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서양에선 ‘김치 들어간 한국식 버거’ 등을 얼마나 즐기는가로 자신의 세련되고 포용력 있는 취향을 과시한단다.
▲“음식은 음식일 뿐이다”
저자가 성토하는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다. 온기가 넘치는 소소한 밥상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확실히 아니다. 스타요리사에 무조건 적대적인 것도 아니다. 정성을 조리하는 어느 무명 요리사가 차려 준 음식을 맛보는 기쁨을 무시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푸디즘은 경계가 필요한 대상이다. 비싸고 진귀한 음식만을 찾는 건 식이장애보다 더 심각한 문화장애라고 했다. 음식으로 영적인 갈증을 채운다? 웃기는 일이다. 이데올로기의 편견 혹은 강요에 불과한 것을. 음식이 예술이다? 스테이크가 어찌 심포니가 될 수 있으며 푸아그라가 어찌 푸가와 어원이 같을 수 있겠나. 이 지점에서 저자는 ‘철학에서 관념론은 머리가 돼버린 배이며 강한 욕망이 특징’이라고 말한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적확하게 데려다 빗댔다. 푸디즘이야 말로 배와 위장의 욕망이며 아무리 난리를 쳐도 정신으로는 승화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러니 채널만 돌리면 쏟아지는 먹방과 쿡방이 저자에겐 ‘푸드 포르노’로만 보이는 건 썩 당연하다.
저자의 철칙은 음식은 음식일 뿐이란 거다. 그의 신랄한 비난에는 유기농과 로컬푸드가 그저 고급 식재료이기 이전에 한번이라도 농민과의 연대를 생각해보자는 의도가 담겼다. 책의 원제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먹은 음식이 아니다.’ 그 옛날 브리야-사바랭이 주장했던 정반대의 논리 아닌가. 그래서 세상에 ‘셰프님’은 없다. 100년도 더 된 격언 한마디 끌어오자면, 식탁 위에 무엇이 올라오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자 위에 누가 앉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