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백주아 기자] “롤렉스도 정말 훌륭한 시계지만 파텍 필립이 명품 중 명품인 이유는 180여년간 내려온 브랜드 헤리티지 때문입니다. 브랜드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녀들에게 제품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절대 웃돈을 받고 되팔지 않겠죠.”(갤러리아 PSR 회원 김모씨(48·남))
| ▲지난 26일 갤러리아 백화점 동관 지하 1층 시계 매장. (사진=백주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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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방문한 오리엔탈워치컴퍼니 파텍 필립 갤러리아 매장. 매대에 진열된 총 11개 시계에는 모두 판매 완료(reserved) 표식이 붙어 있었다. 해당 제품은 고객 동의 하에 매장 내에 전시됐다. 기타 커프스와 주얼리 제품 구매는 가능했지만 시계의 경우 약 40여개 컬렉션의 200여개 모든 제품에 예약 대기가 걸린 상태였다.
백화점 유통가 기준 최소 2000만원부터 10억원이 넘는 고가의 시계임에도 수백 수천명의 대기자가 구매를 위해 이미 줄을 서 있다. 파텍 필립 매장 앞에서 오픈런(Open Run·매장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것) 행렬을 볼 수 없는 이유다. 이 곳은 철저한 VIP 제도로 고객을 관리한다.
이옥수 파텍필립 갤러리아 백화점 매니저는 “브랜드를 사랑하고 제품을 소장할 수 있는 분에게 기회가 공정하게 돌아가도록 VVIP에게 제품을 더 주기보다 양보 해달라고도 말씀드린다”며 “제품을 만나는 가장 정직하고 빠른 방법은 매장에 대기를 걸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파텍 필립에서 18년, 갤러리아 매장에서 11년째 근무 중으로 브랜드 기조와 제품을 누구보다 명확히 아는 사람이다.
| ▲파텍필립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컬렉션(THE GRAND COMPLICATIONS COLLECTION). (사진=파텍필립 공식 홈페이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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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 사이에서 스위스 하이엔드 시계 파텍 필립(Patek Pilippe)은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는 정말 귀한 시계로 통한다. 이들이 파텍 필립을 사랑하는 이유는 ‘희소성’ 때문이다. 현재도 많은 부분을 기계가 아닌 경력 10~30년 이상 된 장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생산량이 극히 제한된다. 파텍 필립의 연간 생산량은 약 6만개로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춘 롤렉스의 연간 생산량(약 100만개)의 17분의 1 수준이다. 명품 브랜드 중 에르메스와 샤넬이 다른 것처럼 하이엔드 이미지 생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소량 생산을 하기 보다 시스템 차이에서 희소성이 생기는 셈이다.
상위 1% 찐부자들이 파텍 필립을 기다리는 이유는 ‘개인이 소유하는 게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보관하는 시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브랜드 철학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파텍 필립은 지난 1839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귀족 노베르트 드 파텍과 시계 장인 프랑수와 차펙의 ‘파텍 차펙’ 상회로 시작해 대공황 이후 1932년 찰스와 장 스턴 형제가 인수한 이후 4대째 가족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 회사다. 단순한 시계의 가치를 넘어 장인 정신이 담긴 예술품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김하연 오리엔탈워치컴퍼니 파텍 필립 브랜드 매니저는 “광고를 보면 항상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딸과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파텍 필립은 시계의 가치를 넘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로써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길 원하는 것이 진정한 브랜드 취지”라고 말했다.
| ▲파텍필립 노틸러스 컬렉션(THE NAUTILUS COLLECTION). (사진=파텍필립 공식 홈페이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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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희소성’ 때문에 파텍 필립은 ‘아무나 살 수 없는 시계’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브랜드에 관한 오해나 루머도 커졌다. 시장에서는 ‘5~30억원 어치를 구매해야 인기 제품 한점을 보여준다’는 게 정설이나 파텍필립 측은 이 같은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구매 이력이 쌓인 VIP에게 우선권이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러 제품 실적을 높인다고 순서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특정 지위층이나 VIP만 구매할 수 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파텍 필립은 많은 사람에게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VIP를 초청해 이벤트를 여는 것에 집중한다면 파텍 필립은 2년 주기로 전 세계를 돌며 ‘시계 예술 대전(Watch Art Grand Exhibition)’을 개최하고 구매자 외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둔다. 제품을 보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인식해 갤러리아 매장은 고객이 시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모든 제품을 3개월 이상 진열한다.
다만 한정판 제품이나 원하는 시간에 당시 시간을 종소리로 알려주는 10억원대 미닛 리피터 등 특정 모델은 파텍 필립 대표를 포함한 소수의 임원들이 신청자의 구매 스토리와 이력을 확인해 결정한다. 제품의 가치를 알고 보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지난 2020년 출시된 ‘그랜드 마스터 차임 Ref. 6300 A’ 모델은 한화로 360억원에 낙찰되면서 시계 경매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파텍 필립의 ‘고상한’ 브랜드 철학에도 높은 진입 장벽에 기다리다 지친 소비자들은 리셀(Resell·재판매) 시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대기를 걸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운 좋게 구매가능한 제품을 만난다 해도 실적이 없으면 인기 제품을 만나려면 수십년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파텍필립 노틸러스 5711/1R-001 제품 착용 모습. (사진=백주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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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지난해 9월 론칭한
LF(093050)가 운영 중인 라움워치 편집숍은 파텍 필립과 오데마피게, 바쉐론 콘스탄틴, 롤렉스 등 구하기 어려운 희소한 시계를 확보해 판매 중이다. 최대 장점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어 공기만 파는 백화점과 달리 고가의 시계를 직접 착용해 보고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텍필립의 인기 제품인 ‘노틸러스’의 전체 모델을 확보하고 있는 곳은 라움이 유일하다.
김지석 라움워치 매니저는 “LF가 만든 라움 워치를 만든 취지는 귀한 제품을 일반 소비자들이 한층 수월하게 구매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진입 문턱을 낮추기 위함”이라며 “시계 가치를 보존하면서 제품이 손상되지 않게 유지해주는 평생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유통가보다 프리미엄이 붙어도 라움을 찾는다”고 말했다.
| ▲LF 라움워치 부티크 외관(왼쪽)과 내부(오른쪽). (사진=백주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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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시계 시장에 몸 담은 사람들은 백화점 출고 가격이 의미가 없어진 시대라고 말한다. 코로나19 전후로 시계 시장이 과열되면서 제품을 소유하는 대신 리셀을 위한 제테크로 활용하는 VIP도 나타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명품 시계 리셀 시장에서 파텍 필립 제품은 유통가 대비 약 4~6배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파텍필립의 아이콘이자 현재는 단종된 노틸러스5711 금통 제품 유통가는 8590만원이지만 리셀가는 4억9000만원으로 5.7배 높다. 아쿠아넛 제품은 3100만원짜리가 리셀 시장에 나와 1억8000만원으로 5.8배가 뛰었다.
조지욱 유튜브 시계왕TV 운영자는 “세상이 변하고 사람도 변하지만 파텍필립에는 시계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보관한다는 180년간 지켜온 확고한 철학이 있다”며 “사회초년생 때 처음 오토메틱 시계에 매료돼 손목 위에서 물 흐르듯 움직이는 초침에 빠져 밤 새우는 줄 모르던 순수함을 잊고 어느새 시계의 디자인과 기능보다 거래되는 가격에만 집중하게 된 시계병 환자들에게 파텍필립이 묻는 것 같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대사처럼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이라고 말이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