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 출신으로 서울 금천구 총선 출마를 선언한 조승현 정치의미래연구소 소장은 이런 금천구에서 ‘해결사’가 되겠다고 자신했다. 그가 도전해야 할 대상은 현역 초선인 최기상 의원이다. 판사 출신인 최 의원은 지난 21대 총선 때 민주당 20호 인재로 영입돼 금천구에 전략공천됐다.
조 소장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10년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그해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의 캠프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팀의 일원으로 일했다.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선거 전략으로 한 전 총리를 알렸다.
2012년에는 국회 비서관으로 들어왔고 문재인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이때도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선거 전략을 짰고 수행했다. 이후 민주당에서 부대변인직 등을 하면서 여러 당무를 담당했다.
조 소장은 의욕적으로 “금천구의 해결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금천구가 다른 구와 비교했을 때 교통과 시설 등에 있어 낙후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이 없는 서울 자치구로는 금천구가 유일할 것”이라면서 “지하철 역도 3개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안산선이 들어온다고 해도 지하철 역 2개가 더 추가되는 정도다.
이제는 많이 사라진 산동네도 금천구에 있다. 이들 지역은 수십년 전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 서울에 막 올라온 가난한 이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마을버스가 아니면 다니기 쉽지 않은 교통 오지에 가깝다.
조 소장은 “제2의 고향인 금천이고, 뼈와 살을 묻어야 할 곳인데, 조금이라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금천구에 호압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고 800년된 은행나무도 있고 흥선대원군의 99칸 별장도 있다”며 “정조대왕이 부친의 묘를 찾아가면서 머물렀던 곳도 바로 금천구”라고 말했다.
이어 “국악과 관련된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있다”며 “이런 문화적인 자산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신혼 때부터 살아온 곳이 금천
조 소장과 금천구와의 인연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꽤 늦은 결혼을 하면서 그는 처가가 근처에 있는 금천구 시흥동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신혼집을 꾸리면서 금천구 주민이 됐다. 조 소장은 “사랑을 늦게 만난 덕분에 금천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말했다.
정치 입문을 했을 때 금천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는 것을 생각해봤다. 그러나 금방 접었다. 그는 “초중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 선출직으로 나간다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 소장은 “정치 경험과 지역경험은 현역 의원보다 더 많은 게 강점”이라며 “정치는 법적 판단의 영역을 넘은 종합적인 예술인데, 예술을 해봤다는 점에서도 큰 강점이 있다”고 자신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조 소장은 영화 일을 했다. 제작과 배급 등의 일을 하는 프로듀서 역할이었다. 1999년 세계최초의 인터렉티브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관람자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갈라지는 형태다. 그는 “하이퍼링크라는 단어조차 모를 때”라며 “어차피 극장에 올리지 못할 작품을 인터넷에 올리자는 취지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세계최초의 인터랙티브 영화가 됐다. 국립영상원에까지 보존돼 있다.
이후로도 영화 쪽 일을 계속했다. 작게 연극 제작도 했다. 공연 기획을 하면서 여러 배우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중 김명곤 배우의 요청을 받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시청광장 노제의 총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때 한명숙 전 총리와 만나게 된다. 한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의 공동장위위원장이었다. 이후 한 전 총리의 선거 일을 돕다가 문재인 대선캠프에까지 합류하게 됐다.
진짜 금천구민이다 강조
지역 유권자들에게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조 소장은 “자신은 진짜 금천구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금천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고 제2의 고향과 같다”면서 “여러 경험을 통해 정치에 최적화된 사람이란 것도 깨달았다”고 지지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