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10여년 전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란 조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디지털의 약점을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완하자고 주장했던 ‘디지로그’는 이후 한국 지식정보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런데 낯설던 ‘디지로그’가 일상 깊숙이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을 만들어 젊은이를 열광시켰을 때, 그게 바로 디지로그시대의 서막인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디지로그 세상은 눈 깜짝할 새 기적처럼 펼쳐졌다. 우리는 이제 사이버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블로그를 만들어 1인 언론사 사장이 된다.
책은 21세기 지식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보여준다. 오랜시간 각계의 문화인사를 인터뷰해 왔던 S매거진의 기자가 이 교수와의 대담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가 무너진 인터페이스의 혁명시대를 정확하게 읽어낼 정보·문화현상을 짚어낸다. 단순히 신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상과 원인을 찾고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먼저 아이디어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지금’을 흥미롭게 설명했다. 3D 프린터의 예를 보자. 중국 상하이의 한 설계사는 2014년 대형 3D에서 뽑아낸 구조물을 조립해 하루에 집 10채를 지었다. 또 같은 해 미국 오토데스크는 ‘엔지니어가 3D프린터로 바이러스를 제작해 암세포를 공격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런 사례를 통해 이 교수는 ‘생물학자가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 엔지니어가 바이러스를 찍어내는 세상’을 설명한다. 디지로그시대는 문명의 축을 정보기술 강국이 몰려 있는 아시아로 옮겨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갈 길은 멀다. 이 교수의 예언대로 휴먼 인터페이스 혁명이 펼쳐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처음 실현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다. 한국은 지식의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란다.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이 교수는 이미 정해진 답에 고정된 죽은 ‘사상’(thought)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생각’(thinking)을 하자고 제안한다. 참다운 지도자론도 펼쳤다. “양(羊)을 이끌거나 몰려 하지 말고 양이 되는 게 21세기의 리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