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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 앞에는 가수 설운도, 태진아 씨 등 연예인 등 각계 인사들이 보낸 근조화환 100여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 등 신상사파와 맞섰던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 씨도 ‘조양은 선교사’ 명의로 화환을 보냈다.
전날에는 분향실 안에는 ‘서울특별시장 오세훈’ 명의로 ‘근조(謹弔)’라고 적힌 조기도 놓여 있었으나 조폭의 빈소에 조기를 보낸 것에 대한 논란을 우려해 이는 철거됐다.
경찰은 조문객 2000명 정도가 예상되는 바, 서울경찰청과 송파경찰서 소속 사복형사들을 병원 주변에 배치시키는 등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는 6·25 당시 대구 특무부대에서 1등 상사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신상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신상사파’라는 이름의 토대가 됐다.
1958년 9월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신 씨는 이후 1960년대 중반 조직을 재건하고 1970년대까지 명동을 장악하고 신상사파 보스로 활동했다. 이는 회칼로 무장한 조직폭력배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신 씨의 회고록 ‘주먹으로 꽃을 꺾으랴’에 따르면 그는 일본 야쿠자 조직과 함께 관광호텔 카지노를 운영해 수입을 올렸지만 마약과 사채, 유흥업소 관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90년 노태우(1932∼2021)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을 때도 신상사파는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1에 따르면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그를 “야인시대를 대표하는 마지막 협객 같은 분”이라고 전했다.
이날 ‘행동대장’으로 고인과 같은 조직에 몸담았다는 A 목사는 빈소를 찾아 “20년 넘게 모신 분”이라며 “그분 뜻을 받들어 1984년에 제가 조직을 나와 신학 공부 후 목사가 됐다”고 말했다.
승복을 입고 빈소를 찾은 한 스님 또한 “강한 사람들이 약자를 못살게 굴 때마다 교통정리를 많이 해 주셨다”며 “장애인 관련 봉사활동도 많이 하셔서 그 인연으로 오늘 빈소를 찾았다”며 추모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