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김 회장은 동경에서 열리는 푸드쇼 관람과 신사업 구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꽉 짜인 일정을 뒤로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 다음날인 13일, 국내 ‘명품 음식점’ 가운데 하나인 <벽제갈비> 도곡동 타워팰리스점 귀빈실에는 중국측 인사 7~8명과 벽제외식산업개발의 김 회장과 핵심브레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룸 안에는 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양측 인사들 누구 할 것 없이 얼굴에는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들로 가득했다. 중국 측 인사들은 중국 하남성 정부 최고위직과 이 지역 5성급 호텔 사장단 일행이었다.
식사와 함께 사업성 대화가 이어지고 서류들이 오고갔다. 그러더니 이내 서로 익숙해진 듯 초반의 긴장감을 벗어나 화기애애한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3~4시간이 흘렀을까. 양측은 서로 만족하는 양 미소를 띤 표정으로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그리고 3월 20일, 양측은 이번에는 중국 하남성의 하남호텔에서 조우했다. 한중 양측 기업대표들 간 파트너로서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기 위해 모인 역사적인 자리였다.
국내 최고급 명품 한우갈비 전문점인 벽제갈비가 중국에 진출하는 기념비적인 조인식인 셈이다. 그것도 ‘브랜드 사용권 로열티 지급’방식으로 5년간 3%를 받게 되는 조건으로다.
매출액의 일정비율을 로열티로 지급받는 방식으로 중국에 진출한 것은 국내 외식업체로는 처음이다. 그만큼 획기적인 사건인 것이다.
◇ <브랜드 로열티 지급> 방식으로 중국진출...국내서 처음
이들은 최종적으로 중국 내에서 가장 경쟁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벽제갈비를 선택했다. 이번에 계약하게 된 하남호텔은 북경 중심부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하남성 정부가 북경 대표부는 물론 직접 운영하고 있는 5성급 호텔이다.
김 회장은 4월초, 하남성 정부 인사들과 벽제갈비 진출에 대한 ‘브랜드 로열티’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적지 않게 흥분해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상시 ‘정중동’이 좌우명이라고 할 정도로 감정 조절에 능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랜드 진출 감회의 여진이 시도 때도 없이 살아나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일편단심으로 추진해 왔던 최고 한우 전문 음식점에 대한 집념을 인정받았다는,
그것도 국내가 아닌, 경쟁이 치열한 해외에서 이뤄졌다는 기쁨이 그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한우고기의 세계화를 위해 10년 전부터 꾸준히 해외 진출을 모색해 왔는데 그 첫발을 중국에서 내딛게 돼 무엇보다 기뻤다. 그것도 콧대 센 중국 측으로부터 국내업체로서는 처음으로 로열티를 받고 진출하게 되었으니 더욱 그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그의 지론이 제대로 먹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외식업계에서 추진력과 직관력이 남다른 이로 불린다. 여기에 뚝심까지 얹혀지면 시너지 효과는 상당하다. 최상의 상품에 최고의 가격을 부르는 그의 배짱 앞에 혀를 내두른 이가 어디 한 둘이었던가.
◇ 적확한 언어와 속살을 건드리는 깊은 고찰 그리고 논리적 안목
그와 마주해 외식업, 특히 한우고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려면 최소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춰야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적확한 언어 구사와 속살을 건드리는 깊은 고찰 그리고 각종 상식과 지식으로 뒷받침 된 논리적 안목들은 김 회장의 오늘을 만든 분신들이다.
중국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지난날들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외식업계에 ‘외’자도 모르고 뛰어든 때가 언제였던가. 그리고 실수와 실패를 밥 먹듯이 했던 초창기의 빛바랜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김 회장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후 무역과 건설 분야에서 10여년을 보내고 37살인 1983년, 처음 외식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애초부터 고기음식점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김 회장이 손을 댄 분야는 피자였다.
그러나 피자 가게는 2년 만에 접었다. 국내에 피자리아멜리, 피자인, 쉐이크피자, 피자헛 등 수입 브랜드들이 이태원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포기했다.
당시만 해도 피자분야는 외국계 브랜드의 위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재기를 모색하고 있던 김 회장은 우연히 알게 된 신촌의 한 갈빗집을 친구와 동업형식으로 인수한다. 그의 나이 40살(1986년) 되던 해다. 4500만원씩을 각자 투자해 시작한 이 업소가 지금 벽제갈비의 전신이다.
◇ 40살에 시작한 고기음식점, 그러나 계속되는 적자에 1년만에 나와
그러나 외식, 그것도 고기음식점에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동업자 두 사람은 계속되는 적자에 적이 당황한다. 198.34m2(60평)짜리 갈빗집에서 하루 20만원씩 한 달에 600만원 판매가 고작이었다. 적어도 1300만원은 팔아야 유지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종업원 인건비가 11만원이고 주방장 월급이 35만원이었다.
등심 1인분이 5000원이었던 시절이다. 지금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또한 두사람 간에도 의견이 자주 엇갈려 충돌이 빈번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기 구입에 대한 의견차이였다. “품질 좋은 한우를 반드시 현지에서 구입하자”, “외상도 되고 젖소인지 무엇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니 그냥 동네 가게에서 사자”가 주된 차이였다.
더 이상 가게운영을 못하겠으니 대신 맡아서 하라는 부탁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벽제갈비를 다시 운영하기로 결심하고는 3가지 원칙을 자신에게 다짐했다. ‘외식업을 평생한다’ ‘가장 우수한 품질을 제공한다’ ‘수치경영 시스템을 구축한다’가 그것이다. 이 원칙들은 훗날 그가 외식업계에서 최고급 한우고기 전문 음식점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데 절대적인 경구로 작용한다.
◇ 재인수한 벽제갈비 4개월 만에 흑자 만들어
적자투성이인 벽제갈비를 재인수한지 4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자신에게 다짐했던 부분들을 반드시 실천해 나간 덕분이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직원간 결속력이 강화되고 좋은 식자재와 경영개선으로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하지만 매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최대 매출상한가는 2400만원이었다. 수익률 역시 600만원이 마지노선이었다. 만족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성이 차지 않았다. 김 회장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강남 지역에서 다점포 전략을 펴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종업원들에게도 약속했다. 장기간 근무한 직원들과 우수 직원들에 한하여 점포를 오픈시켜주겠다고. 이와 병행해 그는 종업원들의 교육에도 크게 관심을 갖는다.
최고의 음식점에 걸맞는 최고의 서비스를 하려면 종업원의 교육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훗날 벽제갈비가 명품 브랜드로서 최고의 음식점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직원교육에 발 벗고 나섰다. 직관력이 남다른 그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그가 공들인 부문은 최상급 한우고기의 확보였다. 최상의 식재는 그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친구와 동업할 당시에도 논쟁이 있었던 고기구매에 대한 그의 결심은 너무나 확고했다. 최고의 식재만 쓰겠다는 그의 다짐은 숭배에 가까웠다. 최상의 고기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처절할 정도의 갈구였다. ‘최고의 음식은 최상의 식재에서 나온다’는 절대 믿음이 오늘의 벽제갈비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이었음은 물론이다.
고기를 파는 도축장이나 도매상들 일부는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까지 치부했다. 조그만 캠핑가스버너를 갖고 다니면서 고기를 썰어 먹어보고서야 구매했을 정도니 당연했다.
◇ 캠핑버너 갖고 다니면서 먹어보고 구매...‘이상한 사람’ 소문도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올림픽 당시까지 물 먹인 쇠고기의 냉동육 위주 판매가 관행처럼 있었던 시절이었다. 고기를 사러 갈 때마다 조그만 캠핑가스버너를 들고 다니면서 먹어보았다.
주위에서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상급 고기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물이 나오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고기가 맛있다며 가게를 찾는 고객들이 늘어났다.”
그의 한우에 대한 집착은 개업초기부터 발동하기 시작한다. 포천, 동두천 등지에서 좋은 한우고기를 도축한다는 정보를 듣고 무작정 달려가 정육점주인에게 한우를 자기에게 달라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주인이 진땀깨나 흘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
이렇듯 그는 좋은 한우고기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방방 어디든 찾아 다녔다. 이로 인해 이곳에서 내놓은 ‘설화한우’ 생갈비와 꽃심구이는 해외언론에까지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선홍색 살코기에 지방이 눈꽃처럼 퍼진 ‘한우 설화육’은 브랜드로서도 명성이 자자해 외국인들의 고급스런 초대에 단연 오르내린다. 또 그가 일본통으로도 잘 알려진 배경에는 쇠고기 요리로 유명한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다닌 인연 때문이다.
이 덕에 그는 이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있다. 이런 여세를 몰아 벽제갈비는 직영점을 계속해서 오픈한다. 1년 간격으로 2, 3, 4호점을 잇따라 오픈하면서 성장속도에 탄력이 붙는다.
◇ 22개 음식점 오픈, 지금은 11개만 성업 중
2호점인 삼성역점의 경우 1일 매출이 4만원하던 업소를 벽제갈비로 상호를 바꾸고 영업한 지 1년 만에 매출이 150만원으로 수직상승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 회장은 점점 사업 확장에의 길로 들어서 모두 22개의 음식점을 오픈시켰지만 현재는 11개만 운영하고 있다.
잘 된 점포들도 많지만 주위의 여건으로 참담하게 거액을 포기하고 눈물을 훔치는 경우도 많았다. 쓰라린 경험들을 모두 겪고 온 탓으로 남 탓을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 그다. 실패의 경험들이 준 공력(功力)이다.
2호점의 경우 점포가 너무 잘 되자 주인이 갑자기 전세를 200% 인상해 달라고 하는 통에 앉아서 내 준 경우이고 보증금 2억5000만원이 들어간 청구백화점 5층 식당가는 부도로 롯데에 넘어가는 바람에 그대로 보증금을 포기해야 했다.
대치동 점포를 매각하고 들어간 826.45m2(250평) 규모의 천호동 점포는 10년 계약으로 들어갔는데 건물주인이 상속세 미납으로 경매처분되는 바람에 보증금과 권리금 5억원을 모두 포기해야했다. 당시는 IMF 상황이어서 금리가 17~20%를 상회하고 있어 버티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점포를 오픈하면서 손실을 본 적도 사실상 많이 있다. 천호점의 경우 5억원을 고스란히 떼이고 나올 때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판단의 실수이고 경험이 미숙해서 발생한 일이어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냥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패를 통해 살아남는 게 진정한 승리가 아닌가 한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배경은 1993년에 오픈한 방이동 본점이 있어서 가능했다.
실 평수 198.34m2(60평)으로 시작한 본점은 영업 호조로 2층까지 넓혔고 다시 별관까지 사용하는 등 현재 모두 1487.61m2(450평)에 이르고 있다.
◇ 실수와 실패도 많지만 쉼 없이 진격하는 끈기 돋보여
김 회장은 목표를 향해 조급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쉼 없이 진격하는 끈기형 사업가다. 그래서 눈앞의 호불호에 크게 연연치 않는다. 목표가 오래지않아 손에 쥐여질 듯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신감이 표정에서 넘쳐난다.
그 부산물이 바로 1995년에 설립된 벽제설농탕, 평양냉면 전문화 개발연구소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브랜드가 바로 <봉피양>이다. 평양냉면과 한우설농탕을 주메뉴 콘셉트로 하는 제 2브랜드인 셈이다.
현재 강남역 인근의 서초점을 본점으로 인천공항, 교통센터점, 방이점, 도곡점, 신월점 등 모두 5개 직영 점포가 있다. 한우설농탕은 165.29m2(50평) 규모의 매장에서 월 1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또한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 11권 ‘24시간의 승부’편에 소개돼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봉피양은 김 회장이 20년 전 장기 근속자와 우수직원들에게 약속했던 소사장제 형식의 창업과 연계되어 있다.
◇ 비전과 꿈이 있는 제 2브랜드 <봉피양>에 기대
따라서 비전과 꿈이 담겨 있는 브랜드다. 현재는 직영점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 작년에 한우의 대중화를 위한 프랜차이즈를 목적으로 출시한 브랜드<벽제구이로>도 주목의 대상이다.
벽제구이로는 한우의 여러 부위육을 메뉴화 해 ‘한우의 대중화’와 ‘잔여육 처리’를 통한 품질향상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도출해 내기 위한 전략브랜드다. 고기만 보아도 ‘전생’을 안다는 김 회장의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아이디어의 산물들이다.
김 회장이 각 분야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장인제도’는 ‘최고’와 ‘최상’을 표방하는 벽제갈비 인천공항점과 도곡동 타워팰리스점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2001년도에 총 26억원이 투입된 542.15m2(164평)의 타워팰리스점은 인테리어 설치에만 무려 18억원이 들었다. 이 때문인지 최고의 명품 음식점으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가 지향하는 한국식 디자인과 고품격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점포다.
20년 동안 벽제갈비에서 근무하고 있는 장인요리사들인 윤원석 이사와 박영근 이사의 손끝에서 나오는 ‘레시피’를 교육받은 직원들이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는 맛은 벽제갈비를 떠받치는 동력이다.
아울러 인천공항에 입점해 있는 벽제갈비도 몰려드는 고객들로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다. 198.34m2(60평) 규모의 이 점포에는 하루 입점고객이 900~1000여명으로 10회전을 할 정도로 늘 북적거린다. 평균 객단가가 1만원 이상으로 한 달 매출액이 3억원대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려는 사람들의 까다로운 심리와 고급 음식과의 만남은 운명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간파한 김 회장의 안목이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 타워팰리스점의 최고급 메뉴, 3억원대를 넘기는 인천공항점
“각 분야에 장인요리사를 길러내고 그 장인들이 만든 표준화를 가지고 그 밑에서 잘 훈련받고 교육받은 직원들이 맛을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게 벽제갈비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장인제도가 빛을 발하는데 약 7년이 걸릴 것이라고 봤는데 이제 그 결과물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
김 회장이 고객에게 전하려고 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따뜻한 마음이다. 벽제갈비가 자체 그릇을 만드는 이유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객에게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감성적 욕구충족을 시켜주기 위함인 것이다.
고객에게 ‘맛’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람 만나는 즐거움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렇듯 자기 확신과 직관력으로 앞날을 투시하는 그가 벽제갈비의 올해를 결코 만만치 않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내막은 이렇다. 신규사업과 매장 리뉴얼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서초동 봉피양 본점의 경우 삼성타운내로 삼성전자가 입주하는데 맞춰 점포리뉴얼 공사를 마무리 할 예정이고 인천공항 교통센타점도 CJ와 새로운 계약 7년을 위해 봉피양 분점으로 올 6월 리뉴얼하게 된다.
◇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멈추지 않는 학습벌레
여기에 한식점 1개 점포와 양식레스토랑 1개 점포를 푸드코트 콘셉트로 추가 개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에게 있어 무엇보다 가장 큰 프로젝트는 중국 북경 하남호텔의 벽제갈비 오픈이다.
오는 7월1일에 오픈일이 예정돼 있어 전사적인 역량을 결집시키는 중이다. 따라서 기존 인력만을 가지고 대형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려면 회사 업무와 직원들에게 과부하가 걸려 어려움이 뒤따를 수 있는 상황을 염려한 것이다.
김회장은 이번 중국 브랜드 수출을 계기로 앞으로 해외 프로젝트시스템을 세가지 차원에서 완성시킬 계획이다.
첫째 직원과 간부가 한국의 외식산업을 ‘지식서비스’ 산업 수준으로 격상시켜 성공모델을 만드는 것. 둘째 고급브랜드 성공에 꼭 필요한 마케팅 전략을 중국 현지에서 펼치는 다국적 기업들의 다양한 마케팅 기법에서 배우는 일. 셋째 사주와 간부, 직원 모두가 함께 한식 세계화의 성공야망을 갖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 등이다.
김 회장은 한시도 쉬지 않는 학습벌레다. 나이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배움에 목말라한다. 이로 인해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외식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작년 9월에 설립된 한중외식협회 초대 회장직도 맡고 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변하지 않는 김 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일 욕심과 추진력 그리고 ‘공학적 감각’의 직관력이 어떤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갈 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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