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고이는 터..창동[땅의 이름은]

<서울편>
조선시대 전매제로 귀하게 관리하던 소금 보관하는 염창
대동법 시행 선혜청 창고로 생겨난 신창, 북창, 남창, 평창
  • 등록 2023-09-23 오전 10:00:00

    수정 2023-09-23 오전 10:00:0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조선 시대 소금은 자유무역 대상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전매해 생산과 유통을 통제했다. 소금이 화폐로 쓰일 만큼 귀한 존재였기에 그런 것이다. 관건은 제때 만들어 제대로 공급하는 것이다. 소금 무역은 해상으로 이뤄졌고, 그러려면 대량의 선박이 필요했다. 관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민간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민간은 소금 무역에 소극적이었다. 배에 싣고 오는 동안 소금이 물에 젖어 녹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뱃삯을 받기도 어려웠고 심하면 추궁을 피하지 못했다.

자염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사진=게티이미지)
그래서 만든 게 염창(鹽倉·소금창고)이다. 통상 소금은 남해와 서해에서 생산해 배에 실어서 한강을 통해서 마포로 향했다. 염창은 마포에 다다르기 직전인 한강 이남 양천현(현재 양천구)에 설치했다. 이곳에 집하한 소금은 작은 배에 소분해 다시 마포로 향했다. 큰 배에 한데 실어 녹아버리는 위험을 분산한 것이다. 강서구 염창동은 당시 소금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지역이다.

창고는 조선시대 주요 시설로 꼽힌다. 잉여생산물은 권력의 것이었고, 이를 잘 다루는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창고가 있던 자리가 지명으로 남아 이어진 곳은 비단 염창동뿐이 아니다.

마포구 창전동(倉前洞)도 창고를 끼고 생겨난 마을이다. 단순히 창고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이 동네 창고는 광흥창을 일컫는다. 고려와 조선시대 관리는 녹봉을 주로 양곡으로 지급받았다. 이들에게 줄 곡식을 쌓고 지출을 관리하는 데가 바로 광흥창이다. 고려와 조선의 관료제를 지탱해오던 광흥창은 현재는 헐리고 터를 알리는 표석만 남았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선혜청 터 표지석.(사진=남대문시장)
용산구 신창동, 중구 북창동, 종로구 평창동은 선혜청과 연관해 생겨난 지명이다. 선혜청은 1608년 시행한 대동법을 책임지는 조선 시대 최대의 권력기관이었다. 대동법은 공납을 쌀로 하도록 통일한 것이다. 각지의 특산물을 바치는 데 따른 폐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선혜청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쌀이 모여들었다. 이들 쌀을 한데 쌓기 어려우니 도성 곳곳에 창고를 둬 분산해뒀다.

지금의 용산구 효창동에 있던 만리창은 선혜청의 별창(別倉)이었다. 이곳에 창고를 새로 지었다고 해서 신창(新倉)이라고 불렀다. 용산구 신창동은 이렇게 이름이 생겼다. 선혜청은 지금으로 치면 중구 남대문 시장에 있었는데, 여기를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에 창고를 뒀다. 중구 북창동(北倉洞)과 남창동(南倉洞) 지명의 유래다. 선혜청의 가장 큰 창고 평창(平倉)은 종로구 평창동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원래 남대문 일대는 선혜청이 있어서 그냥 창동(倉洞)으로 불렸는데 정작 창동은 도봉구에 남아 있다. 창동도 조선 시대 양곡 창고가 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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