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P 재킷의 낡은 종이 위로 시간의 무게가 오롯이 읽힌다.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 안 빼곡히 쌓인 중고 LP 매장 앞에서 손님들이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듯 구부정한 자세로 음반을 고르고 있다. 직경 30cm, 1분에 33과 3분의 1회전으로 재생하는 아날로그 레코드를 들추는 손길들 사이로 추억이 스멀스멀 피어난다(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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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누렇게 색 바랜 엘피(LP) 판들이 서가의 책처럼 천장까지 빼곡히 꽂혀 있다. 지난 24일 찾은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의 한 LP 중고 매장 앞. 평일 낮시간인데도 불구하고 40㎡(약 12평) 남짓한 가게 진열장 주변에는 5~6명의 손님들이 쭈그리고 앉아 30여분째 LP 판을 들추고 있었다.
“1969년 ‘조니 미첼’의 앨범을 찾으려 했으나 ‘앤 머레이’를 대타로 만났다”는 한 중년의 남성은 “LP 판은 직접 뒤지고 찾아봐야 그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며 “예상치 못한 귀한 LP를 구했을 때의 기쁨이 크다”고 LP 예찬론을 펼쳤다.
| 1969년 발행된 조니 미첼의 LP 앨범. 젊은 미첼이 노래하는 ‘보스 사이드스 나우’(Both Sides Now)가 수록돼 있다. 약 1만원 정도에 거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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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고 LP 매장에도 고객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회현동 지하상가도 서울 주요 LP거리 중 하나. 중고 LP 6개 매장이 삼삼오오 몰려 있다. 명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가게들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하상가로 하나둘 옮겨오게 된 것.
1962년 문을 연 명동의 장인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해 온 이석현(46) 중고 LP 전문점 리빙사 대표는 “명동시절보다 유동인구는 줄었으나 얼마전 ‘토토가’ 열풍 이후 찾는 발길이 50%가량 늘었다”며 “10대부터 노인, 외국인까지 확실히 수요층이 다양해졌다”고 귀띔했다. 그 덕에 매출이 반짝 늘었단다. 하지만 그래봐야 매장을 운영할 정도. 이 대표는 “세계적으로 LP 유통 물량이 줄고 중고 온라인 사이트가 넘쳐나다 보니 문 닫는 매장도 늘고 있다”며 “그나마 우리 가게는 오랜 단골 덕에 명맥을 잇고 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LP의 매력을 ‘입체감’이라고 표현했다. MP3가 2D라면 LP는 3D라는 얘기다. 그는 “LP에선 가수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생생한 교감을 얻을 수 있다”며 “CD는 반사음을 삭제해 깔끔하지만 소리를 인위적으로 왜곡하는 반면 LP는 바늘이 판의 골을 지나면서 만나는 먼지의 음결까지 전달, 고역대부터 저역대까지 음색이 풍성하다”고 설명했다.
|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의 한 중고 LP 매장 문 앞에 희귀 LP판과 포스터들이 장식돼 있다(사진=김정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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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판의 가격은 사실 별로 의미가 없단다. 애호가들의 취향에 따라 부르는 게 값이다. 다만 공식은 있다. 이 대표는 “가격은 임의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에서 매년 LP 희귀성과 판매경로, 소비현황 등을 분석해 평균가를 책정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며 “일부 희귀 LP를 제외하면 대중적인 LP의 경우 당시 찍어놓은 수량도 많아 대략 적게는 5000~1만 5000원 선에 거래되는데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소장한 LP 중 최고가는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등 3장의 앨범으로, 몇 년 전 시세로도 약 1000만원대다. 옛것과 희귀가 만나면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뛴단다.
일부러 먼 곳에서 딸과 함께 매장을 찾았다는 안모(51) 씨는 “LP는 직접 닦아주고, 걸어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내가 노력한 만큼 가치를 얻는 거 같다”며 “적어온 목록 중 올드팝 6장을 5만 5000원에 구했다”며 흐뭇해 했다.
이 대표는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일고 있는 아날로그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녹음기술과 카메라 화소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자연의 소리와 색을 고스란히 담는 것은 힘들다. 요즘 복고가 유행이라는데 단지 과거의 것을 추억할 수 있어서 찾는 것은 아닐 거다. 빠르고 바쁜 삶에서 벗어나 느리고 여유있는 삶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 장인의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 중고 LP 전문점 ‘리빙사’의 이석현 사장이 LP판을 정리하고 있다(사진=김정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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