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칼럼] 가습기 살균제 파문과 '깨진 유리창'

  • 등록 2016-05-20 오전 3:01:01

    수정 2016-05-20 오전 3:01:01

퀴즈 하나. 범죄가 들끓는 지역에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와 유리창이 멀쩡한 차량 두 대가 있다고 하자. 일 주일후 이들 차량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두 자동차를 비교해 보니 유리창이 온전한 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유리창이 파손된 차량은 배터리, 타이어, 심지어 엔진 열을 식혀주는 라디에이터(방열기)까지 도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차량을 턴 이들은 깨진 유리창을 자동차 주인이 차량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여긴 것이다.

위의 사례는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짐바르도가 1969년에 실험한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지역 일대가 더 큰 무질서와 범죄로 이어지는 무법천지가 된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가습기 살균제 파문도 이같은 교훈을 일깨우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에 함유된 독성 화학물질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흡입해 약 270명이 목숨을 잃고 피해 환자만 16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살균제 사망 사건의 최대 가해업체인 영국 옥시레킷벤키저가 보여준 후안무치(厚顔無恥)와 보건당국의 무능한 대처는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옥시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은 PHMG가 폐를 딱딱하게 굳게 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폐섬유화 현상’과 다른 치명적 독성을 함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옥시 등은 정부가 PHMG 성분이 있는 살균제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뻔뻔스럽게 제품을 판매해왔다. 이는 사실상 간접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다.

정부 당국도 이번 파문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환경부는 지난 1996년 PHMG를 흡입하면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제조신고서를 받았지만 이 물질에 대한 추가 독성자료를 요구하거나 이를 유독물질로 지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만일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환경부가 보여준 ‘깨진 유리창’에 옥시 등 관련업체가 전 국민을 상대로 ‘살균제 테러’를 자행한 셈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옥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유리한 보고서를 써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대 수의학과 조모 교수다. 국내 독성학 권위자라는 사람이 악덕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아 허위 실험보고서를 써줬다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가습기 살균제 폐해는 뒷전으로 한 채 ‘직위의 가치’를 벗어던지고 이윤 챙기기에만 급급한 그의 치졸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학자적 양심과 과학윤리가 무너지면 우리 사회가 기댈 언덕은 사라진다.

영국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국가권력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으로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강조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도 ‘국민의 자연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역설했지만 살균제 파문 현장에는 이러한 철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 이익과 공공 이익이 상충할 때 개인 이익만 고집하면 경제주체 모두 파국을 맞는다. 목초가 풍부한 초원에 통제할 수 없는 가축이 들어오면 결국 초원은 방목할 수 없는 황무지로 전락하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이 경영활동을 하는 데 지장을 주는 정부 규제를 없애는 것은 시대적 책무다. 그러나 기업과 관련당국이 안전불감증과 적당주의로 일관하는 공유지의 비극을 연출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 메커니즘보다는 ‘보이는 손’인 정부 규제가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꼭 필요한 규제’는 매우 엄격하게 해 시장 규율을 살리면서 국가를 안전하게 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글로벌마켓부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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