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1. 임차인 191명으로부터 보증금 148억원을 가로채 전세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모씨가 지난달 7일 사기죄의 법정최고형인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남씨로부터 보증금 7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30대 남성 피해자는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후 또다른 피해자 3명이 세상을 등졌다. 이 사건을 심리한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부장판사는 “현행법은 악질적인 사기범죄를 예방하는 데 부족하다”며 사기죄의 법정최고형 형량을 높이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 사건은 다수피해자 범죄에 대한 현행 형법의 처벌규정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 사례다. 미국의 경우 죄에 대한 형벌을 합산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이같은 사건에서 수백년의 징역형도 선고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형법은 죗값을 모두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한 죄에 1번 가중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제약이 있다. 전세사기를 2번 했든 100번 했든 징역 15년 이하의 범위에서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사기범죄자들이 다수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 2023년 4월21일 전세 사기 피해자 A씨가 숨진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B아파트의 출입구 앞에 입주민회의 추모화환이 놓여 있다. (사진= 이종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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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달 22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에 발생한 큰불로 점포 220여개가 소실되는 등 막대한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행정안전부는 화재 피해자들에게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준하는 지원에 나섰다. 이같은 큰 사고시 재난상황을 이용해 절도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경우 등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독일 등에서는 타인의 재난 등 상황을 틈타 절도나 사기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가중처벌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행 형법규정은 이에 대해 가중처벌하지 못하는 한계에 갖혀 있다. 죄의 규정체계 자체가 새로운 가중·감경 요소를 반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체계여서 확장성이나 유연성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범죄의 가중규정 방식을 개편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3. 기술발전과 함께 등장한 전자문서의 경우도 문제가 누적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디지털화, 모바일화되고 있음에도 문서위조죄의 대상은 여전히 원본문서나 복사문서에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문서는 위조해도 문서위조죄로 처벌되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다. 디지털화를 포함해 인공지능(AI) 등 기술발전을 형법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그래픽= 김일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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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법조계에 따르면 우리 형법은 1953년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급하게 제정됐다. 당시 하루빨리 일본 법에서 벗어나 우리 법을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뜻을 모아 형법을 제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실상 일본 법안을 상당부분 가져다 썼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이후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터지고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땜질식으로 형법을 부분 개정하거나 입법 편의만을 생각해 갖가지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우리 형법 체계가 누더기가 됐다는 게 형사법 전문가들의 평가다. 형법의 전체적인 틀을 손보지 않고서는 이같은 문제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류전철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반국민들은 형법상 불법은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해서 특별법상 불법은 경미한 법위반 정도로 받아들이는 점을 고려하면, 전면적인 개정작업을 통해 특별법의 불법유형을 형법으로 편입함으로써 규범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김혜정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우리 사회가 극도의 혼란기였다면 지금은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고 범죄양상도 크게 달라지고 있는데 형법은 이같은 변화를 담아내고 있지 못해 전면적인 개정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 현행 형법에서 최고형량이 10년인 사기범죄의 경우 죄의 숫자가 2개인 경합범(한사람이 2개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뜻함)은 최대 15년까지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기범죄에 대해서는 추가 처벌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힌다. (단위: 년, 개, 자료: 한국형사법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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