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한국인②] "대기자 3000명" 점집 몰리는 2030

탑골공원 인근 사주포차 손님의 80%가 젊은층
진학, 취업, 승진, 결혼 등이 주요 관심사
선거철, 입시철, 승진철에 손님 대거 몰려
스마트폰 보급에 따른 정보홍수 속 옛방식 선호
  • 등록 2015-05-29 오전 6:16:30

    수정 2015-05-29 오전 9:20:51

진학, 취업, 결혼, 이사 등 삶의 주요 길목에서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늘면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점집이 성행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 인근에 줄지어 들어선 ‘사주포차’들(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믿기 힘들겠지만 진학문제 상담을 위해 미국서 두 번이나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중 어디에 지원할지 하나만 정해달라고 했다. 얼마 뒤엔 두 곳에 모두 합격했다며 다시 귀국해 어디로 진학하는 게 좋을지 말해달라고 했다.”(하늘산진로적성연구소 상담 내용 중)

지난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 인근.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10여개의 점집이 분주하다. 일명 ‘사주포차’다. 한가로워 보이는 밖의 풍경과는 달리 사주포차마다 사주풀이, 타로점, 관상을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주라고 하면 왠지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80%가 20∼30대다. 인사동과 인접한 탓인지 미국·중국·일본 등 외국손님도 간간이 눈에 띈다.

17년간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면서 3년째 이곳서 사주포차를 운영 중인 K모 씨는 “최근 ‘결정장애’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진학문제는 물론 연애·결혼운, 이사나 사업운 등을 묻는 사람이 되레 늘었다”며 “종로 인근은 물론 강남, 이화여대·건대 입구 등 젊은이들이 몰리는 번화가에선 사주카페나 사주포차를 흔하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불경기 때 제일 장사가 잘되는 곳이 점집이라는 속설대로 도심 곳곳의 ‘운명상담소’는 말 그대로 호황이다. 당장 닥친 진학·취업·승진·배우자 선택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주요 고객. 이른바 ‘메이비 세대’로 불리며 결정장애를 겪는 이들이 옛 방식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산속에 위치한 유명 철학관을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결정장애를 겪는 이들을 돕는 곳이 적지 않다. 서울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인근에 자리잡은 하늘산진로적성연구소가 대표적이다. 회원수만 3만여명으로 국내 최대규모인 네이버카페 ‘역학사랑방’의 오프라인 공간이다.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하늘산 대표는 “평범한 사람보다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연예인, 스포츠스타, 정치인, 경제인은 물론 유명 언론인도 단골로 찾는다”고 소개했다.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끝이 없다. 하늘산 대표가 보여준 엑셀파일에는 예약대기자만도 3000명. 지금 당장 접수하면 상담에만 무려 3년을 기다려야 한다. 가끔 전화나 이메일 상담 요청도 있지만 대면상담이 원칙이다. 직업군도 판검사, 의사, 기업인, 대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등 다양하다. 선거나 입시철, 공무원이나 판검사 승진철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묻는 내용도 각양각색. 정치인은 출마나 당선, 기업인은 인수합병(M&A) 여부 등이 관심사다. 공직자는 승진, 일반 직장인은 주식시세나 승진, 이혼 여부 등을 많이 묻는다.

하늘산 대표는 “결정장애는 정말 결정을 못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일이라 더 현명한 판단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며 “확고한 확신을 갖고 싶어서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햄릿은 우유부단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본질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라며 “어떤 정보도 믿기 힘든 불신의 시대가 결정장애를 불러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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