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최근 가장 재밌게 본 공연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매번 달라지는데, 지금 한 작품을 꼽자면 지난 7일 국립정동극장에서 막을 내린 음악극 ‘섬: 1933~2019’(이하 ‘섬’)이다. ‘소록도 천사’로 불리며 40여 년간 한센인을 위해 봉사한 오스트리아 간호사 마리안느 슈퇴거, 마가렛 피사렉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차별이 만들어낸 편견과 혐오가 어떻게 우리 사회 속에 하나의 ‘섬’을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
| 음악극 ‘섬: 1933-2019’의 한 장면. (사진=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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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2019년 초연 이후 재공연을 하지 못하고 사라질 뻔한 작품이었다. 소극장 공연임에도 회당 12명에 달하는 많은 배우가 나오는데다, 상업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라 재공연을 선뜻하겠다고 나서는 제작사나 공연장이 없었다. 국립정동극장, 그리고 공연제작사 라이브러리컴퍼니가 공동 제작에 나서면서 5년 만에 재공연이 성사됐다. 그 결과 ‘섬’은 전석 매진에 힘입어 3회 추가 공연까지 진행했다. 국립예술단체와 민간 제작사가 함께 시너지를 만든 의미 있는 성과였다.
국립정동극장은 2020년부터 ‘2차 제작극장’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섬’처럼 작품성을 갖췄으나 재공연이 쉽지 않은 창작 공연에 재공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4년째에 접어들면서 ‘섬’과 같은 성공 사례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국립정동극장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전통 상설공연장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립정동극장이 2010년대 추구했던 방향이다. 4년간 정체성을 새로 정립해온 국립정동극장의 운영 방향을 문체부의 일방적인 지시로 바꾸는 듯해 공연계는 우려하고 있다.
문체부가 올해 처음 추진 중인 국립예술단체 청년 교육단원 사업에서도 이 같은 일방통행식 운영이 드러난다. 국립예술단체 청년 교육단원 사업은 청년 공연예술가에게 국립예술단체 무대 경험과 실무교육을 제공해 ‘차세대 K컬처 주자’를 발굴하는 취지의 사업이다. 문체부는 올해부터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립예술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청년 예술가 교육 사업 공모 절차를 일방적으로 통합했다. 단체들은 문체부의 지시를 따르느라 혼선을 겪었다. 최근 문체부가 내년부터 청년 교육단원의 숫자를 더 늘리겠다고 국립예술단체에 통보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국립예술단체 입장에선 제한된 예산으로 문체부의 지시를 따라야 해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문체부가 최근 국립예술단체를 통해 추진하는 여러 사업을 보면 국가 주도로 ‘K컬처’를 이끌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물론 국립예술단체는 ‘국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국가의 문화예술 정책을 따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금처럼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의 밑바탕에는 창의성과 자율성이 있다. 문화예술 정책 또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한다.
또한 한국에선 기관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손바닥 뒤집기 하듯 함께 바뀐다. 국립예술단체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왔다. 한국으로 몰려오는 외국인 관광객에 ‘K컬처’를 소개하고, ‘K컬처’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은 중요하다.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눈앞의 성과만 바라보며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