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그저 도라지위스키 맛…불안한 청년도 고독한 중년도"

원앤제이갤러리서 개인전 '그림의 맛' 연 작가 서동욱
회화전공 뒤 영상에 매료돼 佛 유학도
홀로 지속가능한 작업 '그림'으로 회귀
빛·조명·배경 등 연출해 미장센 담아내
"예술로 카타르시스 가능케하는 '인물'"
  • 등록 2020-11-30 오전 3:30:01

    수정 2020-11-30 오후 6:06:56

작가 서동욱이 서울 종로구 북촌로 원앤제이갤러리 개인전 ‘그림의 맛’에 건 자신의 작품 ‘담배를 피우는 DW’(2019) 옆에 섰다. 인물화를 그리는 작가의 몇 안 되는 자화상 중 한 점이다. 서 작가는 “대책 없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림 속 대상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표정 없는 사람들. 하얀 벽 앞에 줄지어 앉고 섰다. 어깨는 힘없이 떨어져 있고 시선은 나를 피해 멀리 달아나 있다. 그나마 억지로 부딪쳐본 눈길에선 불안이 스친다. 그 부담감에 이젠 내가 피해야 할 판이다. 절망감? 아니,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깊은 생각들에 빠진 듯하다. 그러니 차라리 털어놔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저들에게서 적극적인 제스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차피 저 틀을 깨고 나올 마음들이 없어 보이니까. 마치 걸치고 입은 셔츠와 바지처럼 한몸이 된, 소파·탁자·벽·문·책·카페트·컵 등등이 공모해 만든 저 방안 배경에서 미동도 하지 않을 듯하니까. 이것이 우리가 입만 떼면 한마디씩 보태온 현대인의 고독감이고 상실감인가. 그 실체가 색감과 질감을 입고 이렇게 드러난 건가.

그림과 그림 사이를 옮겨가며 이렇게 심정이 복잡하기도 쉽지 않다.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려 했던 그간의 ‘작품감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작가보단 사각프레임에 박힌 저 인물들의 의도를 가늠하고 있으니까. 만약 그것을 목적에 뒀다면 성공했다. 참 영리한 그리기를 한 셈이다.

짐작과 추측이 서로 꼬리를 물며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던 그때, 다행히 그가 옆에 와 섰다. 작가 서동욱(46). 이제야 저 그림 속 인물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게 됐나 보다.

서동욱의 ‘JH’(2020). 표정 없는 여인의 허망한 눈빛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온다. 작가는 인물들에 붓자국을 덧입혀 감정을 증폭시킨다(사진=원앤제이갤러리).


△영상작업 거쳐 멀리 돌아 다시 쥔 ‘붓’

서울 종로구 북촌로 원앤제이갤러리. 서 작가가 ‘그림의 맛’을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곳이다. ‘치장 없이 내버려둔’ 밝고 환한 전형적인 화이트큐브 전시장에 회화 28점을 걸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그것이 되레 유별나게 돼버린 요즘, 작가는 그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회화, 화가들조차 좀처럼 그리지 않는다는 인물화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전시장에선 먼저 기대 이상의 두 가지가 보인다. 작품 크기와 작품 수. 자화상인 ‘담배를 피우는 DW’(2019)를 비롯해 ‘가죽창고의 WW’(2020), ‘WJ’(2020), ‘SH’(2020), ‘CH’(2020) 등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모두 100호(162×130㎝) 규모. 이외에도 ‘밤-터널을 지나면-다리를 지나면’(2020), ‘밤-주차장-메시지’(2020), ‘전화를 받지 않는 JE’(2019) 등 어림잡아 신작 28점 중 절반은 50호 이상이다. 내면은 둘째치고 저들의 외현에 주눅부터 들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서동욱의 ‘밤-터널을 지나면-다리를 건너면’(2020·왼쪽)과 ‘밤-주차장-메시지’(2020). 인적이 드문 밤길에 세운 인물들은 태생부터 얘깃거리를 품고 있다. 모델부터 빛·조명·배경까지 작가의 연출력이 빚어낸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모델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장면을 연출해 작업한다”고. 다시 말해 지인을 앉히거나 세우고 주위를 다듬어 사진을 찍은 뒤 그중 한 컷을 화면에 옮긴다는 얘긴데.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이의 이력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림 잘 그리는 재주 하나뿐이던 그가 정작 몸과 마음을 투자했던 건 ‘영상작업’이었단다. 내친김에 프랑스로 유학까지 떠날 만큼 빠져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런 그를 되돌린 건 그림이었다. 그것도 인물화. 어쩌다가?

“초창기에는 영상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작업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 그때 새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새로움을 새로움으로 누르며, 계속 자기 부정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다. 영원한 아마추어가 아닌 지속가능한 전문적인 것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그게 그림이더라.” 결국 그림에는 희망이 없다며 떠났던 길을 멀리 돌고 돌아 온 셈이다.

서동욱의 ‘가죽창고의 WW’(2020). 작가는 저 자리에 저 인물을 앉혀 놓았을 뿐 이해든 추측이든 나머지는 전적으로 보는 이의 몫이다. 100호 규모(162.2×130.3㎝) 대작 인물화 중 한 점이다(사진=원앤제이갤러리).


대신 그가 영상작업에서 시도했던 ‘효과’는 살려둔다고 했다. “화면을 연출했던 경험을 그림 속 배경으로 반영하는 편이다.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고 모델에게 디렉션을 주고, 빛·조명까지 의도하는.” 한마디로 캔버스 안에서 미장센을 구현하는 거다. 그런데 왜 굳이 ‘허구적’이라 하는데? “그리려는 대상과 거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든 예술가로서든 대상을 향한 욕망의 시선을 감추려는 거다.”

지독하게 속을 쓰리게 했던 저 인물들은 결국 모두 그의 머리와 붓이 만든 작품이었던 거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슴을 내민다. “인생이란 게 그저 도라지위스키 같은 맛이 아니겠나. 씁쓸한 현실과 허세가 버무려진.” 바로 자신의 붓을 움직인 건,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한 ‘정서’라는 설명이다. “현대미술이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라 요즘 작가들은 페이소스보다 아이러니만 선호하는 것 같다. 그 경향과 달리 난 정서적인 호소력을 선호하는 편이다.”

작가 서동욱이 자신의 작품 ‘담배를 피우는 DW’(2019)에 쓴 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거친 붓자국을 품고 있는 인물화는 작가가 고안한 독특하고 중요한 화법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진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묘사하는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다르다.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는 소리다. 이를 두고 그는 “표현은 사실적이나 태도는 다른 문제”라고 했다. 묘사보단 공감이 우선이란 것으로 이해했다.

△“사람에겐 얼굴이 있고 눈빛이 있다”

모두 ‘인물화’란 카테고리 안에 묶이겠지만, 그이의 인물들도 변화를 겪는 중이다. 초기작에서 파고든 건 청춘이었단다. 인물을 벽 쪽에 몰아붙이듯 세워놓고 젊은이들의 방황·불안을 그렸다. 2006년 즈음 발표했다는 ‘서 있는 사람들’ 연작이다. 카메라에 달린 플래시의 강렬한 불빛에 반응하는 인물들을 포착해 차갑고 날카롭게 뽑아냈다. “섬광이란 게 찰나의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청춘과 찰나는 잘 맞았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원앤제이갤러리에 연 서동욱 개인전 ‘그림의 맛’ 전경. 오른쪽부터 ‘CH’(2020), ‘WJ’(2020), ‘전화를 받지 않는 JE’(2019)(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러다가 어스름한 자연광 아래 던져둔 연작 ‘실내의 인물’들이 2013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서사를 겹겹이 입힌 그들의 말 못할 사정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셈이고. 사실 작가가 정작 그리고 싶었던 건 ‘성공한 중년남자의 고독’이란다. 이룰 건 다 이뤘지만 단 한 가지가 부족한 그들. 그 밀도감이 본격적으로 어떻게 번져 나올지는 앞으로의 과제가 됐다.

기법에도 변화가 생기는 중이다. 붓자국을 남겨 거칠지만 세밀하게 끌어냈던 그들이 언제부턴가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 장면에서 옮겨왔다는 ‘여름-바다-눈부신’(2020) 연작이나 ‘멜로디’(2020), ‘무제’(2020) 등, 예리하고 냉철한 기교를 빼버린 ‘편안한’ 그림이 나오고 있다. 무엇이 다른 붓을 쥐게 했을까. “현실은 힘들다. 그렇게 힘든 것조차 멋지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서동욱의 ‘여름-바다-눈부신’(2020) 연작. 근래 들어 변화를 주고 있는 작가의 ‘다른 인물화’다. 영화 속 장면에서 옮겨왔단다. 작가의 인물들도 변화를 겪는 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북촌로 원앤제이갤러리에 연 서동욱 개인전 ‘그림의 맛’ 전경. 예리하고 냉철한 기교를 뺀 ‘편안한’ 그림들을 한 데 모았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무제’(2020),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멜로디’(202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이의 이름에 따라붙는 ‘리얼리즘 초상화’란 수식은 그렇게 붙었을 거다. 가장 현실적인 그래서 가장 위태로운, 내 눈과 내 붓이 타협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시대를 위무하는 예술의 역할은 해야 하는. 작가는 작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아픔을 겪는 과정인가 보다. “예컨대 볼펜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나. 사람에겐 얼굴이 있고 눈빛이 있다. 예술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가능케 하는 게 회화고 인물이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림일 뿐인데. 감정의 찌꺼기 따위는 없어야 하거늘. 그런데 묘한 일이다. 자꾸 뒤통수를 잡아끄니 말이다. 결국 사람이 들어 있어선가. 차마 뿌리치고 돌아설 수 없는 그들이 참 오래 밟힌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작가 서동욱이 개인전 ‘그림의 맛’을 열고 있는 원앤제이갤러리 전시장에 섰다. 오른쪽은 ‘SH’(2020). 불안한 눈빛과 손동작, 그려놓고 놨더니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를 닮아있더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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