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동의 없이 신체를 불법 촬영해 유포·협박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확산하는 가운데 범죄 악용 소지가 다분한 ‘동영상 무음 촬영 애플리케이션(앱’)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해당 앱을 통해 불법 촬영을 한 이후에만 제재할 수 있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몰카 악용 소지 높은 앱 버젓이 유통
무음으로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앱은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애플 앱스토어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동영상 무음 촬영 앱은 동영상 녹화 시 촬영음이 나지 않는다. 해당 앱은 다운로드 횟수가 50만건이 넘은 상태다.
문제는 단순 무음 촬영 기능 이외에도 범죄 악용 가능성이 큰 기능도 있다는 점이다.
개발자에 의해 ‘닌자캠’으로 불리는 앱은 이용자가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는지 주변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다른 앱을 동시에 구동하면서 녹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하고 있거나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촬영하는 동영상 녹화가 가능하다. 휴대전화 화면을 꺼놓더라도 블랙박스처럼 녹화는 계속된다.
이외에도 촬영된 영상물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일반 앨범과는 별도의 ‘비밀앨범’에 PIN 번호를 걸어둔 채 저장할 수 있다. 불법 촬영이 발각되지 않기 위한 기능들을 모두 갖춘 셈이다.
앱을 시작하면 ‘부도덕한 목적이나 불법 목적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라는 실효성 없는 경고 문구만 게시돼 있을 뿐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정모(26·여)씨는 "가뜩이나 불법 촬영물 관련한 문제로 지하철, 화장실 등에서 괜히 불안하다"며 "불법 촬영을 하는지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는 어플들이 나오니까 언제, 어디서 촬영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섭다"고 했다.
대학생 신모(23·여)씨는 "도촬 당한다고 생각돼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불법 촬영을 하는 사람보다도 촬영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더욱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하는 사회라서 불안하다"고 말했다.
'닌자캠' 앱 제작사에 일각의 우려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수 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진화하는 무음 카메라 앱...마땅한 제재 수단 없어
상황이 이러한데도 해당 앱을 제재할 별다른 법적·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지난 2003년 당시 정보통신부는 카메라폰 오·남용 방지를 위해 휴대전화로 사진과 동영상 촬영 시 촬영음이 강제적으로 발생케 하는 등 규제방안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2004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가 휴대전화 카메라 촬영 시 60~68db의 촬영음이 발생하도록 하는 표준규격을 마련했다.
해당 규격은 법적 규제를 강제하는 기술적 요구사항이 아니므로 권고사항에 그치지만 제조사들의 자발적 합의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구속력 있는 규제와 같이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해당 표준에서 제시한 기술적 방안을 무음 카메라 앱까지 적용하도록 휴대폰을 제조하기에는 어렵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무음 앱을 활용한 도촬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지난 2013년 카메라 무음 앱들도 촬영음이 발생하도록 하는 기술적 방안이 표준규격에 포함됐다. 하지만 카메라 무음 앱의 경우도 권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앱이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해당 앱을 통해 불법 촬영을 해서 유통하는 경우 문제가 되고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윤상연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최근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면서 불법 촬영에 따른 성범죄에 경각심이 생기고 있다"면서도 "불법 촬영 의도가 있는 사람이 무음 동영상 앱처럼 비밀스럽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방법을 접하게 되면 이를 통해 범죄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카메라 이용한 성폭력 범죄에 '몰카 포비아' 현상까지
지난 7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분기별 범죄동향 리포트 제14호(2020년 1분기)’에 따르면 카메라 촬영을 통한 성폭력 범죄는 지난해 5881건, 2018년 6086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성폭력 범죄 중 각각 18%, 19%를 차지하는 수치다. 올 1분기(1~3월)에만 925건으로 집계됐다. 상반기에만 하루 평균 약 10건씩 발생했던 셈이다.
실제 범죄는 통계보다도 더 많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몰래 이뤄지는 불법 촬영 특성상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해자도 모르는 사이에 몰래 촬영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 불법 촬영 불안감을 호소하는 ‘몰카 포비아’ 증세도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가 시민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9%가 불법 촬영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중 여성이 80%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호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최근에 수백 배 확대 촬영이 가능한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의 발달이나 불법 동영상 촬영에 악용할 소지가 있는 앱들이 여성들의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며 "앱을 통한 불법 촬영은 기술 발전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동안 불법 촬영을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놀잇거리로 생각해왔던 성(性) 문화와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 했던 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스냅타임 고정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