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문은 같았지만 문제는 달랐다. 해당 모의고사에선 문맥상 어휘 활용이 적절치 않은 것을 고르는 문제가 나왔지만, 실제 수능에선 지문을 읽고 가장 적절한 주제를 찾는 문제가 출제됐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이를 이유로 “우연의 일치”라며 이의신청 자체를 수용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평가원의 해명을 믿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수능 때마다 출제위원 300명, 검토위원 200명 등 약 700명이 39일간 외부와 단절된 합숙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는 외출은 물론 전화·우편이 모두 차단된다. 문제 출제를 위해 인터넷을 사용할 때도 보안요원이 참관한 가운데 이뤄진다. 이런 보안 규정 때문에 평가원이 ‘문제 없다’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분노는 컸다. 문제가 달라도 수능 전 미리 지문을 접해본 수험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해당 문항에 대한 이의신청 건수가 영어교과 전체(349건)의 61.6%(215건)를 차지했음에도 불구, 평가원이 이를 일부러 심사 대상에서 뺐다는 점이다. 감사원은 “담당자들은 수능 공정성 논란을 우려해 해당 안건을 아예 이의심사위원회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공모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평가원은 EBS 측이 수능 이후 ‘A씨가 교재 감수 중 알게 된 지문을 수능에 무단 출제’한 사실을 알렸지만 이를 묵살했다.
평가원은 1998년 각종 학력평가를 위해 설립된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교육부는 매년 평가원에 약 200억원의 수능 예산을 지원하면서도 평가원을 감사하려면 총리실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교육계에선 ‘평가원이 교육부 말도 잘 안 듣는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이참에 평가원을 총리실 산하 기관에서 분리, 교육부로 이관해 강력히 개혁하는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