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삼풍’ 잊혀진 추모 공간…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12명 숨진 아현동 人災 주소조차 남지 않아
추모비 세워도 보이지 않거나 가기 어려워
추모공간에서 참사 위험 되새기는 시민들
"갈등중재기구로 보완입법도 함께 마련해야"
  • 등록 2023-10-27 오전 6:00:00

    수정 2024-10-18 오전 10:20:12

[이데일리 이영민 기자] “여기 10년째 살고 있는데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29년 전 12명이 희생된 ‘아현동 도시가스폭발사건’의 사고현장에는 당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24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애오개역 4번 출구에서 만난 직장인과 학생들은 매일 오가는 거리에서 대형참사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용산구에 사는 방옥태(41)씨는 “그때 13살이었는데 (사고가) 기억난다”며 “여기서 일어났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마포구에 사는 박모(17)양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추모 공간은 피해자와 지자체, 인근 주민들의 주요 화두였다. 희생자 추모와 지역 경제 등 여러 이해관계가 뒤엉키는 동안 참사는 시민에게 잊혔고, 유사한 참사가 반복됐다. 10·29 이태원참사 발생 후 유가족과 생존자, 시민단체 역시 지난 1년간 한목소리로 ‘기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억의 공간을 조성하고, 이에 대한 관리 체계도 함께 마련해 참사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1994년 12월 7일 아현동도시가스폭발사건이 발생했던 애오개역 일대에 24일 퇴근길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사진=이영민)
12명 숨진 아현동 도시가스폭발사건, 주소 사라져 기억에만 남아

1994년 12월 7일 서울 마포구 아현 1동 한국가스공사 아현도시가스 공급기지 밸브실에서 가스가 폭발했다. 그해 12월 9일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일로 발생한 불길이 가스관을 타고 번져 12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택 50여 채와 자동차 30여 대가 불에 타면서 놀란 주민 5000여 명이 급히 대피하기도 했다.

아현동 화재사건의 현장 주소는 사건 이후 이뤄진 재개발과 도로 명 주소 개편으로 인해 사라졌다. 동사무소와 인근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찾은 사고현장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거나 당시 참사를 알리는 표시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마포구 주민 최모(70)씨는 “추모공간을 두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동판이 설치된 서울 마포구 와우공원 계단(사진=이영민 기자)
서울 마포구 와우공원 입구 계단에 설치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추모동판(사진=이영민 기자)


“큰 사건인데 왜 이렇게”… 숨바꼭질하듯 찾아야 하는 추모 공간

일부 대형참사가 발생한 후 추모 공간이 마련된 곳이 있지만 부적절한 공간과 관리 탓에 시민의 발길이 끊겼다. 1970년 4월 서울 마포구에서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현장에는 이후 와우공원이 들어섰다. 부실공사 때문에 발생한 아파트 붕괴는 순식간에 3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공원 입구 계단에는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가로·세로 20~30㎝ 크기의 동판이 설치됐다. 하지만 추모동판은 크기가 작고 세월의 때가 가득 묻어 시민의 눈길을 못 받고 있었다.

일주일에 1~2번 공원을 방문한다는 중국인 유학생 우모(25)씨는 기자가 동판을 손으로 가리키기 전까지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몰랐다고 말했다. 우씨는 “이태원참사 때 친한 친구가 한 명 죽었다”며 “한국에서 아파트가 또 무너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서울 서초구 매헌시민의숲에 마련된 삼풍참사위령탑도 시민에게 잊혔다. 공원 북쪽 출입구에 설치된 위령탑은 주위에 심어진 나무와 양재동 꽃시장, 회사 건물들에 둘러싸여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6개월째 공원에서 청소일을 하는 임모(74)씨는 “오늘 여기가 삼풍위령탑인 걸 처음 알았다”며 “여기 일하면서 저기 가는 사람을 못 봤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매헌시민의숲에서 본 삼풍참사위령탑(사진=이영민 기자)
1994년 발생한 성수대교 참사의 희생자 위령비는 강변북로 한가운데 설치돼 도보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위령비 앞 차도에는 가드레일이 설치돼 있어 접근도 쉽지 않았다. 성동구에서 나고 자란 이모(78)씨는 “차도에도 가드레일이 있어서 못 가고 너무 외딴곳에 둬서 진입이 안 된다”며 “(참사가)자꾸 사람들에게 잊히는데 경각심을 일으키려면 이런 작은 공사라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로 향하는 진입로(사진=이영민 기자)


시민·전문가, “과거 참사 기억해 반복되는 사고 막아야 해”

참사의 추모공간 인근에서 만난 시민들은 기억공간 조성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대형참사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경북 고령군에 사는 성모(24)씨는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 기억 공간이 세워진 2015년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어른들에게 그런 참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나의 사건 정도로 생각했는데, 새까맣게 탄 벽과 기둥을 보고 그날의 참담함을 느꼈다”며 “추모공간에서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환기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추모 공간이 조성되면 사회적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희숙 조선대 인문학연구원장은 “애도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피해자들을 다른 사회 구성원과 연결해 공동의 기억을 형성할 수 있다”며 “주기적으로 과거의 일을 현재의 사회적 경험으로 환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추모공간도 중요하지만 이후 제대로 된 관리와 재발방지를 위한 예산·법·행정부 개혁이 동반돼야 그 의미가 살 수 있다”며 “제3자가 참여하는 갈등중재기구를 통해 이 일을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 마련된 대구지하철참사 기억 공간. 참사 당시 화재로 그을린 벽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들이 적혀 있다.(사진=대구교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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