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태의 코덱스]난독증 시대 '거울 글쓰기'

  • 등록 2019-09-11 오전 5:00:00

    수정 2019-09-11 오전 5:00:00

[임규태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수석고문]난독증 시대다. 선천적 난독증 환자가 아닌 후천적 난독증을 겪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들은 책 한권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하며 심한 경우 책 한 페이지, 더 심한 경우 글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왜 난독증에 빠지는 것일까?

후천적 난독증 환자는 정보화 시대의 희생양이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 이후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정보통신기술(IT) 혁명 덕분에 개인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절대적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현대인은 집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버스에서 TV,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보 처리 능력은 유입 정보양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개인에게 주입되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끝까지 읽고 판단할 여유가 없으니, 각 정보의 앞부분만으로 전체 내용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입력되는 정보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개별 정보를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초기’ 정보의 길이는 짧아진다. 짧은 정보만으로 판단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긴 글을 읽어내기 어렵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대다수의 현대인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후천성 난독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후천적 난독증 환자는 긴 글을 읽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화하는 상대의 ‘말’도 끝까지 들을 수 없게 된다. ‘말’도 정보이다. 난독증 환자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앞부분만 듣고 판단해버린다. 깊이 있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SNS를 지켜보면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미리 판단하는 난독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진다.

문제는 소통 능력이 거세된 후천적 난독증 환자들로 가득 찬 사회는 필연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비극적 상황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좌우 대립은 소통 부재의 결과물이다. SNS에서 오직 자신의 말만 떠들 뿐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상대방 말은 듣지도 않고 비난을 퍼붓는다. 전형적인 난독증 환자들이다. 서로 자기의 말만 떠들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어떤 사회가 분열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현대인의 집단적 난독증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종종 발견되는 거울 글쓰기 방식. 시선의 흐름에 따라 첫줄은 정방향(왼쪽에서 오른쪽), 다음줄은 역방향(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는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다빈치가 남긴 친필 노트를 모은 코덱스에 현대인의 난독증을 치유할 실마리가 담겨 있다. 다빈치는 코덱스를 작성할 때 문자를 뒤집어서 작성했다. 거울에 비춰야만 글씨가 바르게 보이기 때문에 ‘거울 글쓰기’라고 부른다. 왜 다빈치는 이런 특이한 방식으로 글을 적었을까?

다빈치는 왼손잡이였다. 그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이가 귀했을 뿐 아니라 질도 좋지 못했다. 왼손잡이가 날카로운 펜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면, 거친 종이 위에서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다빈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적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하지만 다빈치가 왜 거울 글쓰기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아무도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다빈치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암호화했다고 주장하면서, 신비주의를 부추긴다. 하지만 코덱스에는 다빈치의 ‘천재적’이고 ‘감추고 싶은’ 내용만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빨래 목록처럼 감출 필요가 없는 내용이 더 많았다. 다빈치는 코덱스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두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빈치는 왜 문자를 뒤집어 적었을까?

나는 다빈치가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천재라서 거울 글쓰기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고 추정한다. 그는 어딘가에서 거울 글쓰기를 보았고, 그 방법을 왼손잡이인 자신에게 적용했을 뿐이다. 사실 거울 글쓰기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종종 발견된다. 그는 그리스 문헌에서 거울 글쓰기의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에게 적용한 것뿐이다.

다빈치가 젊은 시절 고대 그리스 문헌을 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당시 피렌체에서 영향력 있는 공증인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다른 평민과 결혼하면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지만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정식 학교에 다녔다면 라틴어와 가톨릭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오른손으로 글을 쓰도록 교육(혹은 강요) 받았을 것이다. 다빈치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아버지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베로키오의 예술 공방에 추천한다. 다빈치는 그곳에서 동로마 멸망 직후 탈출한 헬레니즘 학자들이 가지고 온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사실 고대 그리스 문헌은 단순히 문자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정방향과 역방향을 교차한다. 첨부한 이미지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첫줄을 정방향(왼쪽에서 오른쪽으로)으로 쓰면, 다음 줄은 역방향(오른쪽에서 왼쪽으로)으로 적는다. 이때 역방향 줄의 문자를 뒤집어 적는다. 마치 소로 밭을 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므로 우경법(牛耕法)이라고도 부른다. 우경법으로 쓰인 글은 놀라울 만큼 읽기가 수월하다. 시선이 ‘왼쪽-오른쪽-오른쪽-왼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숨이 긴 정보의 인식에 장시간 집중할 수 없는 난독증 환자도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우경법과 다빈치의 거울 글쓰기의 핵심은 뒤집어 쓰인 글씨를 읽는 능력이다. 혹자는 다빈치의 뒤집어 쓰인 글을 읽기 위해 거울을 써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물론 처음에는 뒤집힌 문자를 읽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뒤집어진 글자를 읽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끝까지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다빈치의 거울 글쓰기는 후천적 난독증 환자로 가득 찬 소통 불능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교훈을 제공한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는 다빈치가 500년 전 거울 글쓰기로 적었던 코덱스 노트와 다르지 않다. 지금 난독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거울 글쓰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우리가 베스트아티스트
  • 태연, '깜찍' 좀비
  • ‘아파트’ 로제 귀국
  • "여자가 만만해?" 무슨 일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