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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 위원장은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특유의 꼼꼼함도 관가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한마디로 스타일이 강했던 것이다. 강 위원장이 후배들로부터 ‘덕장(德將)’보다는 ‘지장(智將)’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강 위원장의 예상치 못한 ‘깜짝 카드’인 한국판 양적완화(QE)는 특유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있는 공약이다. 정부마저 ‘노코멘트’로 부담스러워하지만 강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자신감도 보이고 있다. 강 위원장이 제시한 ‘가보지 않은 길’이 경제계에 몰고 온 파장은 생각보다 커 보인다.
발권력 남용 전례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
강 위원장이 내세운 양적완화의 핵심은 ‘중앙은행 역할론의 변화’다.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산업금융채권과 주택금융공사의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한은이 직접 매입하겠다는 게 공약상 명시돼있다. 다만 이건 하나의 예일 뿐이라는 게 강 위원장의 생각이다. 방법을 찾자면 더 찾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강 위원장은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중앙은행은 양적완화를 통해 돈을 늘리고 있다”면서 “(한은도 기준금리에만 매달리지 말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양적완화를 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 양적완화 공약을 굽힐 뜻이 없다는 의지다.
다만 현행법 문제는 그리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라는 얘기도 없지 않다. 대다수 선거공약의 이행방법 자체가 법 개정 혹은 제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총선은 예비 국회의원들이 입법의 방향을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이벤트다.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한 건 발권력 남용 문제다. 발권력은 한은만이 갖고 있는, 돈을 찍어내는 능력이다. 당연히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그 부담은 국민에 전가된다. 발권력의 유혹은 한 번 발을 담그면 자꾸 눈이 가게 될 가능성도 크다.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처럼 복잡한 국회 의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돼서다. 경기 부양이 급한 정부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그래서 한은이 이같은 발권력을 쓴 건 외환위기 당시 뿐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연구소 연구원은 “발권력 동원은 비상사태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은 사람들도 “지금 우리나라가 일본 유럽 같은 위기는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가 비(非)기축통화국이라는 한계도 분명히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양적완화를 통한 유동성이 해외로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기축통화국과 큰 차이점이다.
일각서 비전통적 거시정책 필요성 주장도 나와
강 위원장의 파격 공약은 “나라 경제가 이런데 한은은 숨어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정치권 일각의 볼멘소리를 대변하는 측면도 엄연히 있다.
만에 하나 강 위원장이 양적완화 정책을 최우선 경제공약으로 밀어붙이고 총선에서 압승한다면, 논의의 차원이 한 단계 더 올라갈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신임 한은 금융통화위원 후보자들은 대체로 친(親)정부 색이 강하다.
기재부와 한은의 내부 기류도 약간의 온도차가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코리아 나라장터 엑스포’에서 기자들과 만났지만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다만 내부에는 한은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특유의 심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한은은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주열 총재는 30일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양적완화 공약은 한은이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면서 “다만 한은도 우리 경제에 활력을 회복하도록 하고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