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묻어둔 기억을 하나씩 들춰내다가 결국 잠을 설쳤다. 엉킨 기억은 1990년 어느 날에 도착해 있었다. 한 선배에게서 책 한 권을 받았다. 저자는 신영복. 제목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의 글이라면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가 더 유명한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던 것도 떠올랐다. 사실 당시는 누군가의 감옥행이 엄청난 일도 아닌 불운의 시절이지 않았나. “베갯머리에 두기에 좋을 거야.” 갑자기 선배의 뒷말이 울렸다.
그 말대로 한동안 머리맡에 책을 둬봤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잠들기 전 조금씩’이 당최 되질 않았던 거다. 스물일곱에 영어의 몸이 돼 마흔일곱에 풀려났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옥살이로 다 보낸 셈이다. 이럴 때 대개 인생은 두 갈래다. 악에 바친 복수의 신이 되거나 ‘다 용서하마’의 초인이 되거나. 그는 누가 봐도 뒤의 경우였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이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이 이것뿐이었나. “고립돼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세칭 옥살이란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돼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이것이 쏟아 낸 ‘욕’의 전부라니. 하지만 결국엔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려는 의도를 읽어낸 거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정확히 한주 전에 먼저 떠난 이도 있다. 원로배우 백성희. 굳이 신영복과 비교하자면 ‘나은 삶’이겠지. 최소한 묶였던 적은 없으니. 하지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노배우를 추억케 하는 건 단연 연극 ‘3월의 눈’이다. 여든 중반이 무색하게 그녀는 보란 듯 무대에 서서, 손자를 위해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파는 노부부로 나섰다. 눈 내리는 3월의 아침, 남편은 집을 나서며 아내를 향해 독백을 쏟아낸다. “이젠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도 다 비우고 가게.”
두 죽음이 다져둔 인생의 철학은 분명하다. 세상에 감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 무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란 것. 올해는 시작부터 많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