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왜 무릎 꿇은 '전두환 손자' 품었나[현장에서]

전우원 "할아버지는 5·18 죄인이자 학살자"
입던 외투 벗어 희생자 묘비 닦고 참배도
"손자가 무슨 죄"…응어리 풀고 감싸 안아
'화해의 길' 가려면 '꺾이지 않는 마음' 필요
  • 등록 2023-04-03 오전 6:00:00

    수정 2023-04-03 오전 7:27:35

[광주=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제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인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고 학살자입니다. 가족을 대변해서 인정하고 정말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 같은 죄인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늦게 찾아뵙고, 더 일찍 사죄의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가 지난달 3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참배를 위해 방문해 작성한 방명록 글.(사진=김범준 기자)
1980년 5월18일로부터 1만5658일(42년10개월13일)째가 되던 날인 지난달 31일.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27)씨가 광주를 방문해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및 유족 등을 만나 큰절을 올리고 무릎 사죄를 했다.

이날 ‘광주의 봄’은 전씨와 5·18 유족들이 부둥켜 나눈 ‘뜨거운 눈물’과 ‘따뜻한 포옹’을 기다렸다는 듯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보였고 온도는 한낮 최고 27도까지 올랐다. 전씨 일가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5·18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던 만큼 첫 역사적인 사죄 행보가 되길 바라던 ‘봄날’이었다.

전씨는 이날 국립5·18민주묘지도 찾아 방명록에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는 글을 남기고, 입고 있던 검정 코트를 벗어 5·18 희생자·행불자·신원미상자들의 묘비를 손수 닦으며 참배했다.

전씨의 이러한 언행에서 진정성이 통했을까. 광주 시민들은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18을 잊지 못하고 전두환씨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의 손자 우원씨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을 보내며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맞이하고 품어줬다. 미국 생활 중 돌연 “저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광주에 가서 사과하고 싶다”며 스스로 귀국해 경찰에 마약류 투약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은 후, 첫 행선지로 곧장 광주를 찾은 전씨의 결단도 ‘울림’을 줬을 것이다.

5·18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약하다 숨진 고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씨는 전씨의 손을 꼭 잡고 끌어안으며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두렵고 고통이 컸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광주를 제2의 고향처럼 여기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자”고 격려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 옥중 사망한 고 박관열 열사의 누나 박행순씨는 “우린 항상 열려 있으니까 배고프면 언제든지 이리로 편하게 와서 ‘어머니 밥 주세요’하면 내가 밥 해 주겠다”며 마치 친손자 대하듯이 화답했다.

다만 현장에서 만난 일부 광주 시민들은 전씨의 의도와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거나, 전 전 대통령이 끝내 반성을 하지 않고 숨을 거뒀다며 여전히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씨는 이날 광주에서 “오늘 하루만 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면서 행동으로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5·18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는 지난 2019년부터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지난해까지 총 여섯 차례 광주를 찾았다.

만약 어떤 이유로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에 그치고 만다면 상처의 깊이만 짙어질 뿐이다. 역사적 사죄라는 그저 허울 좋은 한계에 그치지 않도록 진정성 있는 ‘넥스트 스텝’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5·18의 비극과 아픔을 치유하는 화해의 길은 이제 또 다른 출발점에 서 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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