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상자 속에 갇힌 가상화폐 정책

  • 등록 2018-02-05 오전 5:30:00

    수정 2018-02-07 오전 9:12:27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전문기자] 혁신은 경계 밖에서 이뤄진다. 상자안에 갇힌 사고로는 혁신의 불꽃을 태울 수 없다. 혁신은 제도화 과정에서 진통을 겪는다. 기존의 법과 규칙으로는 새로운 물결을 담아낼 수 없다. 가상화폐(암호화폐)의 제도화 과정이 난항을 겪는다. 기존 틀에 갇힌 편협한 사고, 늑장대응이 투기광풍을 부채질하고 혁신의 씨를 말린다.

법무부 장관의 전격적인 거래소 폐쇄조치 검토, 투자자 강력 반발, 청와대 긴급진화, 실명제 도입과 세금폭탄, 그리고 ‘검은 금요일’의 대폭락 …. 가상화폐를 둘러싼 정부 대응은 갈팡질팡이다. 투기 억제를 위해 메스를 들이 댔지만 허둥지둥, 그 부작용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후폭풍은 여전히 진행형. 오락가락 대책에 시장은 요동을 친다.

정부가 처음부터 규제를 우선시한 건 아니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6년 11월. 범정부 차원의 ‘디지털 화폐 제도화 TF(태스크포스)’가 출범했다.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이 핀테크 산업 발전전략의 일환으로 “미국, 일본의 동향을 보아 가며 제도화를 본격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직후다.

금융위 주도로 기재부, 한은, 금감원 등 관계부처와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가상화폐의 법적 지위, 거래소 등록제, 자금세탁방지, 외환규제 등 제도화를 위한 기본논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곧 유야무야. 모든 게 틀어졌다. 탄핵정국, 대선정국으로 이어지며 관료들이 일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관련 TF는 10개월만인 지난해 9월 다시 가동됐다. 문재인정부 들어 처음이다.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 거래 투명성, 소비자 보호 등 원론적인 방향만 정했다. 가상화폐의 법적 성격 규명부터 논란이 일었다. 금융당국이 선수를 쳤다.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거래소는 쇼핑몰과 같은 통신판매업자로 분류된다.’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니 현장검사를 나갈 권한도 없다며 책임을 비켜간 꼴이다. 할거주의, 면피주의의 전형이다. 정권이 바뀌니 180도 달라졌다.

거래소 라이선스제, 상장요건 강화, ICO(암호화폐공개)규제, 거래 모니터링, 사후 보고….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제도화를 위한 기본조치들이 모두 관리 감독의 사각지대로 방치됐다. 이 틈에 대한민국 거래소는 세계 최고의 널뛰기 시장으로 변했다. 화들짝 놀란 정부, 불길이 이미 치솟을대로 치솟은 상황에서 뒤늦게 진화하려니 무리한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련의 과정은 신기술에 대한 정부의 단선적 시각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가상화폐는 단지 투기상품, 거래소는 불로소득의 향연, 투전판일뿐이다. 보신주의도 투영된다. 문제가 불거지면 일단 획일적인 규제로 틀어막고 보는 미봉책. 규제비용에 대한 편익분석은 언감생심이다.

자본시장법, 외환거래법, 전자금융거래법, 유사수신행위 규제에 관한 법…. 신기술이든 신기루든 가상화폐와 연관된 규정은 각종 법률에 망라돼 있다. 통합적 접근 없이 기존 틀에 갇힌 상자속 접근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 혁신의 제도화는 결국 포용성과 개방성에 달려 있는 법. 불행히도 아직 이 같은 열린 자세는 부족해 보인다. 눈 앞의 버블 잡겠다고 칼부터 휘두르는 즉흥성, 보신과 면피에 급급한 관료주의가 지속되는 한 문재인정부의 ‘혁신’은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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