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판의 진화]④"데모도 뚫고 들어간 야쿠르트 배달..천직이자 자부심"

30년간 명동 배달한 정영희 야쿠르트 아줌마 인터뷰
80년대 호황기 사채, 은행권 배달 시작..외국계까지 접수
상냥한 인사, 부담 주지 않는 고객 관리..영업의 비결
  • 등록 2016-06-17 오전 6:00:00

    수정 2016-06-17 오전 10:38:07

[이데일리 염지현 기자] 1994년 6월 서울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며 명동성당 점거 농성을 벌일 당시 경찰과 노조원 모두를 뚫고 들어간 사람이 있다. 바로 야쿠르트 아줌마 정영희(64) 씨다.

정 씨는 “90년대 숱하게 데모를 했는데 경찰이 다른 사람들은 다 막았지만 ‘추기경님 야쿠르트 배달가야 한다’고 하면 저만은 길을 비켜줬다. 그래도 야쿠르트를 알아봐주고, 판매원들을 존경해준다는 자부심으로 30년을 버텼다”고 말했다.

30년간 명동에서 야쿠르트를 배달한 정영희 씨
80년대 호황 사채, 은행권 배달 시작해 외국계까지 접수

정 씨는 87년도 한국야쿠르트 방판 사원으로 입사한 후 30년간 명동 한 지역에서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사이 바뀐 대통령은 7명. 당시 야쿠르트를 배달시켰던 젊은 신입사원은 백발의 이사가 됐고, 70원이었던 야쿠르트 가격도 170원으로 올랐다.

서울 왕십리 경찰병원 총무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정 씨가 야쿠르트 아줌마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결혼 후 삼남매를 낳은 뒤였다. 정 씨는 “당시엔 육아휴직 이런 개념이 없어서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며 “그러나 공무원이었던 남편 월급으로 아이 셋을 기르기 어려웠는데 마침 옆집 아줌마가 야쿠르트 아줌마를 해보라고 했다. 30대에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 일이 60대 중반까지 이어지며 ‘천직’이 됐다”고 말했다.

70년대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는 길은 왠만한 대기업에 취업하는 만큼 어려웠다. 고졸 이상에 키가 크고, 용모가 단정해야 했다. 교육 기간도 한 달이나 됐다.

공무원 출신에 용모가 출중한 정 씨가 배치받은 곳은 80년대 국내 금융 기업과 사채업자들이 몰려있었던 번화가 명동이었다. 정 씨는 “사채하는 사람들이 손님 대접을 할 때 가장 선호하던 고급 제품이 야쿠르트였다”며 “IMF가 오기 전 90년대 초중반엔 한 사무실에서 100개씩 주문을 하기도 했다. 하루에 1400개 이상 팔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승승장구하던 정 씨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금융기관이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하고, 국내 기업이 외국계로 바뀌고 나서다. 매출을 가장 많이 올렸던 동양증권이 대만계 유안타 증권으로 바뀌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정 씨는 “오너가 바뀌는데다가 외국 사람이니까 출입이 통제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비서에게 물어보니까 오너가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일부러 출근길에 기다렸다가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더니 비서를 통해 야쿠르트 주문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보안이 삼엄했던 중국건설은행도 정말 뚫기 힘들었던 영업장이다. 회사에서 외부인 출입을 막았지만 처음 배달을 시켰던 직원에게 부탁해 한 층 한 층 돌아다니며 중국 직원들의 무대응에도 열심히 인사를 하고, 시식제품을 돌렸다. 보안 요원이 일주일 동안 함께 다니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 후 어렵게 출입 카드를 얻을 수 있었다.

상냥한 인사, 부담 주지 않는 고객 관리..영업의 비결

‘인사를 잘한다’, ‘윗선을 뚫어라’, ‘부담을 주지 않는다’ 30년 간 업계에 몸담은 정 씨의 영업 비결이다. 정 씨는 “윗 선에 배달을 해야지 건물에 출입하기가 쉬워진다”며 “윗 선을 뚫는 가장 쉬운 비결은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지 꾸준히 열심히 인사를 하고, 시식 제품을 권하되 절대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2년째 정 씨의 고객인 천주교 사목회 관계자는 “중간에 돈이 부담돼서 배달을 끊은 적이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재차 권유를 하는 식으로 부담을 주지 않으셨다”며 “배달을 끊어도 항상 반갑게 인사해 주시고, 건강도 챙겨주셔서 나중에 돈이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연락을 드렸다”고 말했다.

고객의 건강을 책임지고,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도 정 씨의 영업 비결이다. 음료를 노숙자에게 베풀고, 매출이 높지 않은 명동성당 배달에 가장 애정을 가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00원, 200원 이익을 따지지 않지만 평균 월 매출 600만원이 되는 것도 고객들이 그런 정 씨를 계속 찾아서다. 정 씨 손에 들어오는 돈은 월 평균 150만~160만원으로 60대 중반 여성의 수입치곤 상당히 짭짤하다.

정 씨는 “60대 중반에도 현업에 일할 수 있고, 고객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전문직이나 다름없다”며 “아무리 세상이 좋아져도 고객 하나하나 맞춤형 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 판매 채널은 방판이 최고”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
☞ [방판의 진화]①모바일로도 안 돼.."쇼핑 캐디가 되어 드릴게요"
☞ [방판의 진화]④"데모도 뚫고 들어간 야쿠르트 배달..천직이자 자부심"
☞ [방판의 진화]⑥아줌마 감성으로 中 뚫는다
☞ [방판의 진화]②IT 시대, 왜 ‘방판’인가?
☞ [방판의 진화]③첨단 하이테크의 총아 ‘야쿠르트 전동카트’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몸짱 싼타와 함께 ♡~
  • 노천탕 즐기는 '이 녀석'
  • 대왕고래 시추
  • 트랙터 진격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I 청소년보호책임자 고규대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