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새 살은 돋게 하고 환부는 잘라내야 고비를 넘을 수 있지만 어디가 새 살이고 어디가 환부인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기업 신용상태를 분석해 새 살과 환부를 판가름하는 곳이 은행과 신용평가사다. 특히 국내 기업 구조조정은 주로 금융당국과 채권은행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 때문에 신평사가 신용등급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금융당국, 채권은행과 서로 마찰을 빚는 일도 간혹 발생한다. 가령 채권은행은 기업에 곧 추가 대출이 이뤄질 테니 신용등급 하향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신평사에 요청하지만, 신평사는 이런 요청을 받아주기 어렵다. 기업이 갑자기 법정관리를 신청해버리면, 그동안 신용등급을 내리지 않은 신평사에 온갖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채권은행은 신평사보다 기업 재무지표 자체를 신용평가에 더 크게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은행 내부의 기업 신용등급은 재무지표를 기초로 산출된 신용등급에서 신용평가 담당자가 위로 두 단계 올리거나 아래로 두 단계 낮출 수 있는 정성적 판단의 여지를 둔다. 그 이상 신용등급을 변경시키려면 기업여신심사위원회, 리스크관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은행의 기업 신용등급은 재무지표가 바뀌는 데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기업여신 규모에 따라 은행의 손실 규모도 달라질 수 있어 대기업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내리기 쉽지 않고 채권은행 간 이해관계도 엇갈릴 수 있어 구조조정 대상 선정 과정에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장단점은 있지만 신평사들이 시장 자율로 이뤄지는 상시 구조조정에서 순기능을 하는 점은 분명하다. 기업이 신평사가 평가하는 신용등급을 높여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려는 동기는 기업 스스로 자산 매각, 부채 상환 등 재무구조 개선에 나서게 한다. 이런 시장 스스로의 구조조정을 활성화하려면 신평사가 적정한 신용등급을 적시에 제시할 수 있는 신용평가의 독립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용평가 전문가들은 신평사의 독립성을 확보해 줄 방안으로 순환평가제와 지정제, 무의뢰 평가 허용 방안 등이 진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 관련기사 ◀
☞ [동력잃은 신용평가 개혁]①`기업부담` 신경쓰다 또 흐지부지
☞ [동력잃은 신용평가 개혁]③"순환제·지정제 도입도 신중해야"
☞ [동력잃은 신용평가 개혁]④“투자자 기반 새 신평사 검토 필요”
☞ [동력잃은 신용평가 개혁]⑤美·EU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동력잃은 신용평가 개혁]⑥신용평가시장 파이 키울 대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