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삼성물산, 엘리엇의 희생양 될 것인가

  • 등록 2015-06-12 오전 3:00:00

    수정 2015-06-12 오전 3:00:00

올해 71세. 뉴욕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 로체스터 대학 심리학 전공. 하버드 로스쿨 졸업. 투자은행에서 부동산 분야 변호사로 활약. 1977년 엘리엇 매니지먼트 설립. 행동주의 투자가. 2014년 현재 개인재산 19억달러.

월스트리트의 거물인 폴 E 싱어에 대한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소개 내용이다. 삼성물산의 주식 7.12% 지분을 사들여 3대 주주로 떠오르면서 제일모직과의 합병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엘리엇 헤지펀드의 창업자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삼성의 입장에서도 버거운 상대임에 틀림없다. 양측의 싸움은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엘리엇이 합병 결의안에 반대하는 가처분소송을 제기했고, 삼성물산은 전격적인 자사주 처분으로 맞서고 있다.

엘리엇은 현재 제시된 합병비율이 불합리하게 결정됐고, 따라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은 건설경기 침체에 따른 주가 하락을 합병비율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현대건설이나 GS건설, 대림산업 등도 모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방의 내면에는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투기펀드의 기질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체제로 넘어가기 위해 터를 다듬는 과정에서 약점을 드러냈고, 엘리엇이 이 틈을 파고들었다는 얘기다.

엘리엇이 과거 재정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한 이후 소송까지 벌여가며 승소한 것이 비슷한 사례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재정위기의 단초가 됐던 사건이다. 엘리엇에 대해 ‘벌처(vulture) 펀드’라고 비난했던 엑토르 티메르만 외교장관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공중을 떠돌다가 허약한 먹잇감을 찾아 무자비한 공격으로 썩은 시체까지 파먹는 독수리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에 앞서 콩고와 페루 정부도 비슷한 수법으로 곤경에 빠트린 바 있다.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펀드설립 이래 연간 평균 14%의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배경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가인 그레그 팰러스트가 ‘벌처 피크닉’이란 저서를 통해 엘리엇을 전형적인 벌처펀드로 규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제는 삼성물산이 그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합병결의가 절차를 밟아 이뤄졌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문제가 확대된다면 복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 법원이 엘리엇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삼성 측을 두둔한다고 해도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하는 ISD소송이 수순으로 받아들여진다. 싸움이 장기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에서의 여론은 오히려 삼성에 불리한 편이다. 블룸버그는 “불공정한 방법으로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이 회장 3남매에 대해 엘리엇이 선전포고를 선언했다”고까지 보도하고 있다. 폴 싱어가 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에 참여했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내달로 예정된 임시주총에서도 아직은 승부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외국인 주주들이 엘리엇에 동조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국내 일부 소액주주들까지 가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제 주주명부는 폐쇄됐고, 앞으로 한 달 동안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수시로 외국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논설실장>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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