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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이란 없다. 돌이 외로워질 때는 수 읽기에 실패했을 때지. 곤마(살아나기 어려운 돌)가 된 돌은 죽게 두는 거야. 단 그들을 활용하면서 내 이익을 도모해야지.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작은 패배를 견뎌낼 수 있어’(‘미생’ 32수).
가로 42cm 세로 45cm. 반상 위 19개의 줄이 만나 만든 361개의 점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흰 돌과 검은 돌이 엮여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갈등이 벌어진다. 조용하지만 집요하고 치열한 과정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바둑을 둔다. 같은 바둑이란 없다. 수가 끝이 없어 컴퓨터도 사람을 꺾은 적 없는 게 바둑이다. 선택한 한 수가 모여 한 판을 이루듯 순간의 선택이 쌓여 인생이 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을 좋아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바둑은 인생 여정과 같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크린뿐만이 아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을 원작으로 한 동명 드라마도 오는 10월 안방 시청자를 찾아간다. 사회 초년생이 겪는 에피소드와 성장과정을 바둑의 묘수와 엮어 풀어낸 작품. 23일까지 누적조회 10억여건을 기록한 웹툰 ‘미생’은 만화책으로 완간된 후 다시 불이 붙어 50만부가 팔려나갔다. 드라마는 원작의 폭발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한 바둑문화의 재조명이다.
전문가들은 바둑의 게임적 특성이 대중문화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봤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예능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크라임씬’처럼 치밀한 수싸움과 심리전을 다루는 콘텐츠가 인기인데 이 과정에서 바둑의 오락성이 재발견돼 대중문화콘텐츠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넷시대에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놀거리가 주목받고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무궁무진한 수싸움을 찾는 새로운 흐름이 생기고 있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바둑은 말의 태생이 정해져 가는 길이 제한된 장기와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움과 생동감이 강해 ‘게임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구미에 잘 맞는다”는 의견을 냈다. 승부의 긴장감과 함께 바둑판에서 삶의 애환까지 뽑아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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