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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환영 만찬. 박근혜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누군가를 소개하자 시 주석이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했다. 13억 인구의 중국 최고 권력자가 반색하며 맞은 이는 한국의 프로 바둑기사인 이창호 9단이었다. 바둑 애호가로 알려진 시 주석은 지난해 6월 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환영 만찬에서 칭하오 9단을 박 대통령에게 직접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번 시 주석 환영 만찬에 이창호 9단을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천연규석(일명 차돌) 바둑알을 시 주석에게 선물하는 등 이른바 ‘바둑 외교’를 펼쳤다.
한국바둑이 변하고 있다.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중이다. 전 세계 반상을 발밑에 두던 전성기는 지났지만 외국정상에게 국가의 브랜드를 알리는 상징물로, 초등학교의 특기교육으로, 만화·영화 등 대중문화의 소재로도 주목받는다. 여기에 IT 선진국 위상에 걸맞게 사이버바둑을 선도하며 디지털시대의 생존법을 마련해가고 있다.
△‘초딩’, 떨어지던 바둑인구 잡다
경기 군포시의 홍진초등학교. 2004년 국내 최초로 전교생에게 정규과목으로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한 곳이다. 특기 적성교육과목으로 바둑을 채택한 학교는 몇몇 있었지만 전교생에게 의무적으로 바둑을 가르친 건 처음이었다. 학부모들은 바둑교육에 반신반의했지만 자녀들이 한결 침착해지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것을 보자 의심을 버렸다. 바둑의 교육효과가 나타나자 경기도 내 바둑특성화 초등학교는 8곳으로 확대됐다.
한국바둑은 2000년대 접어들며 위기를 맞았다. 이창호·이세돌 등 천재기사들의 기세가 약해지고 중국바둑이 부상하면서 1990년대 세계바둑대회를 휩쓸던 한국바둑의 위세는 서서히 떨어졌다. 한때 전체 인구의 35%가 넘던 바둑인구도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계속 하락했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교의 교육프로그램과 연계하며 활로를 찾은 것이다. 최근엔 방과후 교실의 주요 과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초등바둑연맹에 따르면 현재 전국 1400여곳에 바둑교실과 방과후 바둑학교가 개설돼 있다. 덕분에 2003년에 20%까지 감소한 바둑인구는 10년 뒤인 지난해 25%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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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아래’던 중국, ‘고수’를 넘보다
바둑인구의 감소세는 ‘초딩’이 잡았지만 한국바둑은 한 수 아래라 여겼던 중국의 부상에 맞닥뜨렸다. 중국은 2000년대 이후 국가적으로 바둑을 육성하고 있다. 바둑리그는 갑·을·병·여류기사 전 등 4개가 열리고 있으며 최고 명문 베이징대에선 바둑 특기생을 선발한다. 지난 5월 시 주석이 베이징대에서 바둑을 관전하며 이들을 격려한 것도 중국에서 바둑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예이다. 광저우아시안게임에 바둑이 채택된 것도 그 일환. 중국의 기세는 이미 한국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은 중국에 밀려 세계 타이틀 수성에 연달아 실패했다.
△디지털시대의 변화 ‘사이버바둑’
그나마 한국바둑이 독보적으로 앞서나가는 건 인터넷으로 두는 사이버바둑이다. 인터넷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의 대국 프로그램은 일본·중국에 수출됐을 정도. 현재 사이버오로에 접속해 대국을 즐기는 바둑인은 하루 약 10만명 수준이다. 사이버오로 외에 타이젠과 포털사이트의 바둑게임 등을 합치면 하루 100만여명이 인터넷에서 대국을 즐기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3분의 2는 중국에서 접속하는 걸로 파악되고 있다.
김진환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과거 ‘핑퐁외교’처럼 ‘바둑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둑은 국가 간 교류에 중요한 도구”라며 “여기에 ‘미생’이나 ‘신의 한 수’처럼 콘텐츠적 가치도 재평가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수천년간 세상이 바뀌고 디지털시대가 도래했어도 바둑이 살아남은 이유는 바둑만이 지닌 고도의 종합판단력을 요구하는 깊이에 있는 만큼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바둑의 가치는 더욱 조명받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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