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서가]②"개혁半 잡담半…만년적자 꼬리표 뗀 비결"

조환익 한전 사장의 애독서 '잡담이 능력이다'
"잡담은 조직·세대 잇는 윤활유"
"책·신문 통해 위트·창의력 길러"
  • 등록 2015-12-30 오전 6:00:01

    수정 2015-12-30 오전 6:00:01

[이데일리 방인권 기자]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은 “잡담은 격 없는 싸구려 화술이 아니라 첫 만남에서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고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소통을 성공하게 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고 말했다.


[세종=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조환익 한국전력(015760) 사장이 일본 메이지대 사이토 다카시 교수가 쓴 책 ‘잡담이 능력이다’를 꺼내들었을 때 다소 뜻밖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삼국지나 수호지는 아니더라도 솔직히 좀 더 멋진 ‘고전’을 들고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국내 CEO 중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서광(狂)으로 불리는 조 사장이기에 그럴싸한 책을 손에 들고는 폼을 잡은 채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놓은 한 구절을 읊어줄 것이라는 상상이 보기좋게 빗나간 것이다. 최소한 자기계발서는 아닐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틀렸다.

독서광 CEO가 들고나온 뜻밖의 ‘추천서’

생각해 보면 다 ‘허세’다. 만년적자의 ‘골칫덩어리’ 한전을 단기간에 흑자기업으로 되돌리면서 숱하게 ‘깔딱 고개’를 넘긴 조 사장에게 있어 동서고금을 꿰뚫는 묵직한 가르침보다 당장 맞닥뜨리는 ‘소통’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 사장은 그 실타래를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 즉 ‘잡담’을 통해 풀었다.

“2013년 뜨거웠던 여름에 전력수급 책임감에 눌려 있던 직원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어요. 언감생심 휴가는 생각도 못하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전 직원들에게 휴가를 가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직원 휴가 잘라먹는 간부는 3대가 저주 받을 것이다’고 했더니 ‘빵’ 터졌죠. 그 편지 이후 전 직원들이 휴가를 갔다 왔어요.”

사장 지원사격에 직원들은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휴가를 다녀왔고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다 온 직원들은 활력이 넘쳤다. 기적적으로 수급 위기도 무탈하게 지났다. 마음을 읽어준 편지 한 통이 동력이 떨어진 회사와 직원들에게 단비가 됐던 것이다. 이제는 “덥다고 술 너무 마시지 말라”는 인생을 꽤(?) 살아본 사장의 ‘잔소리’ 마저 기다릴 만큼, 한전 직원들의 마음이 열렸다.

“잡담은 격 없는 싸구려 화술이 아니라 첫 만남에서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고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소통을 성공하게 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미리 땅 고르기를 하는 것이죠, 잡담과 의제를 자연스럽고 균형 있게 전환하면서 긴장과 이완을 기막히게 조절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쾌활한 위트와 유머 속에서 말의 심연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어야 하죠”



지공거사 나이..눈 침침해도 책은 옆에 둔다

조사장은 특히 “잡담이 세대간 소통에는 더없이 좋은 윤활유가 된다”고 강조한다. 젊은 세대는 ‘잡담’에 대해 노세대가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와 격의 없는 잡담을 나누다 보면 신세대가 된 것 같단다. 그가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지역 대학 초청특강에 나가 젊은이들과 얼굴을 맞대는 이유다.

따지고보면 사람 관계도 모두 잡담에서 시작된다. 얼굴은 잊혀져도 잡담은 기억되는 법이다. 30초 잡담으로 어색함이 사라지고 상대의 속마음을 간파해내거나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도 있다. 이렇게 통하는 잡담을 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독서로 지식과 정보를 얻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조 사장에게 신문과 책은 창의력,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조간신문은 한 줄도 안 빼고 다 읽고, 좋은 칼럼은 반드시 스크랩을 한다. 책은 정책 서적이나 경영, 소설, 인문학, 수필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이틀에 한 권 꼴로 해치운다. 해외 출장을 갈 때면 3~4권씩 사서 비행기나 호텔에서 다 읽기도 한다. 올해 지공거사(地空居士, 65세 이상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을 일컫는 속어)가 되면서 눈이 더 침침해졌다지만, 아직도 조 사장 근처에는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다산 정약용은 사소한 메모가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는 둔필승총(鈍筆勝總,둔한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 자세를 중요시 여겼고, 아인슈타인은 만년필과 종이, 휴지통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어디든지 연구실이라고 여겼다고 하죠, 메모의 중요성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한전, ‘만년적자’ 주홍글씨 떼고 ‘비상’

“한전은 신의 직장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다.” 조 사장이 2012년말 한전 사장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뱉었던 말이다. 그간 몸담은 정부조직과 공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초가집도 기와집으로 바꾼다’는 평가를 받은 조 사장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전만큼은 쉽지 않았다.

쓰러져가는 한전호(號)의 구원투수를 자처했던 그가 ‘만년적자’라는 주홍글씨를 지우는데 걸린 시간은 2년 반이었다. 2012년 2만8000원대이던 주가도 최근엔 5만원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한전의 실적 개선세가 지속될 것이란 시각이 많다. 고강도의 구조개편 위에 조 사장의 유연한 사고, 독서로 다져진 통찰력, 소통 능력 등이 덧씌워진 결과라는 평이다.

“사장의 일은 결국 ‘잡담과 결단’입니다. 이 두 가지만이 가장 중요한 사장의 일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죠. 사장은 조직의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늘 새로운 니즈를 찾고 아이디어를 발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직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직원을 격려하고 현장 정보를 수집하죠. 이 모든 행위와 관련된 것이 바로 ‘잡담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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