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판결은 판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유사한 사건을 다루는 하급심(1·2심)의 ‘방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하급심 판사들은 대법원 판례를 참조해 판결문을 쓴다. 만일 하급심에서 유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례와 다른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법리와 논거를 준비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대법 판례를 뒤집는 하급심 판결이 극히 드문 이유다.
서울 소재 법원의 한 판사는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다는 부담도 매우 크다. 소신이 없으면 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 판례를 따르는 것은 관행이지 의무가 아니다. 헌법은 판사의 독립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급심에서도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선고가 종종 나오는 이유다.
‘서울변회와 이데일리가 뽑은 이달의 판결’(이달의 판결) 첫 번째로 지난달 11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송모씨와 가족들에게 국가가 1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재판장 김기영)의 판결(2013가합544225)이 뽑힌 이유도 이 같은 맥락이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가 위헌·무효로 선언됐다 해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는 국민 전체에 대한 책임만 있을 뿐 국민 개개인과의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지난해 10월 27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 판결에 이어 다시 한 번 긴급조치 9호를 옹호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를 따르는 하급심이 잇따랐다. 서울고법 민사3부(재판장 강승준)는 지난 7월 17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김모씨와 형제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2014나2040044)을 내렸다. 재판부는 “당시는 합헌이었던 긴급조치에 따라 김씨를 구속한 것이 불법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대법원 논리를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6개월 만에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반란을 일으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는 지난달 11일 “긴급조치 9호는 발령 요건을 갖추지도 못한 채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유신헌법, 현행 헌법에 모두 위반돼 위헌·무효다. 국가는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송모씨와 가족들에게 국가가 1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의 2쪽 이상을 할애해 지난 3월 대법원 판결을 직접 반박했다.
‘이달의 판결’ 선정 자문위원인 여연심 서울변회 인권이사는 “이 판결은 일견 당연한 것으로 보이나 최근에 선고된 대법원의 판결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뒤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이어 “서울변회는 이 판결이 통치자의 노골적인 불법행위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당한 국민은 마땅히 권리를 구제받아야 한다는 법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판단했다”며 “‘고도의 정치성’이라는 모호한 표현 뒤로 숨지 않고 대통령의 위헌적 행위가 국민에 대해 불법을 저지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긴급조치 9호란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행정명령으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무제한 제한할 수 있는 초헌법적인 권한이다. 특히 9번째로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5년 5월 시행돼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해 폐기될 때까지 무려 4년이나 지속됐다. 이 기간 800명이 넘는 지식인과 학생들이 구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