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이 서라벌에 성곽을 쌓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상법사가 글을 보내 왕께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이 깨끗이 씻기고 모든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다스림과 가르침이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더라도 재해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공사를 중지시켰다.(삼국유사 제2권 기이)
왕의 밝은 가르침은 권위를 의미하지만 높은 성벽은 권위주의 왕권을 상징한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으로 노력하면 권위가 점점 쌓여가지만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억누르려 들면 어느새 권위주의에 물들어 어수선한 사회가 된다.
권위는 인격이나 지식이 두터워 사람들이 따르고 스스로 승복하려 하지만 권위주의는 상대방을 위세로 겁박하려는 행태다. 권위는 건강한 사회 발전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바탕이 되지만 권위주의에 흐르면 조직과 사회를 주름지게 만든다. 권위는 존경심을 불러일으켜 세상을 여유롭게 만드나 권위주의자는 사람들에게 예종을 강요하다가 결국 저 자신도 모르게 제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만다. 권위주의에 빠진 우두머리는 얼토당토아니한 억지를 부리고 엄포를 놓아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농간을 부린다. 권위가 쌓여가면 참된 명예가 높아가지만 권위주의에 물들수록 헛된 명성을 추구하다 끝내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정통한 지식과 고매한 인격이 조화를 이뤄야 상황이 변해도 판단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일단 권위가 서면 오래 간다. 권위 있고 존경 받는 인사들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대중이 기댈 정신적 언덕이 돼 사회 적응 능력을 확충시킨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권위와 권위주의를 같거나 비슷하다고 착각하고 엉뚱한 자세를 취한다는 데 있다. 권위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이나 자신의 의견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묵시적 압력을 통해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행패다. 판단력을 잃은 무지한 다수(pluralistic ignorance)가 몰려들어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펼치며 검거나 희거나 막무가내로 떠받들다가 공허한 인생이 된다.
권위주의자들이 그저 편 가르기로 사익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권위는 점점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권위주의자를 무서워하다가 억지로 따르는 팬덤이 갑자기 많아지는 반면 질시하고 경멸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조직이나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멀리 생각해 공공장소에서 엉뚱한 발언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더욱이 양식 있는 지도자라면 한번 뱉은 말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일언천금(一言千金)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지난날 발언들을 금방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에 말을 바꿀수록 권위는 금방 떨어지기도 한다. 하기야 세상을 멀리 못 보니 신중하게 말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권위주의에 빠져 인륜을 무시하고 제 몸만 반짝이려는 인사들의 몰골이 나중에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권위주의에 물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때가 끼어 그 자국이 얼굴에 얼룩져 나타나기 마련이다. 권위주의에 무턱대고 고개를 조아리는 무리는 조금이라도 틈이 벌어지면 금방 배신해 자신은 물론이고 조직과 사회도 망쳐버리고 만다. 평범하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돼 온 경험칙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권위를 쌓아가면 세월이 지날수록 정신적 여유가 생겨 양식 있는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권위주의에 물들어 날뛰는 인사들일수록 정작 본인들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인 염치를 모르는 철면피가 되기 쉽다. 무엇인가 가득 찬 듯 가짜 권위를 내세우며 뻐기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엿보면 텅 비어 갈팡질팡한다. 한자 빛날 광(光)은 어진 사람(人)이 들고 있는 횃불(火)을 상징한다. 인품과 식견을 가진 권위라야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