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에는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최근 원주에서는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환수 기념행사가 열렸어요. 무려 112년 만에 고향으로 귀향한 것을 기념한 것인데요. 총 33개 부재 중 지속적인 점검이 필요한 옥개석과 탑신석을 제외한 31개 부재가 원주로 돌아왔어요. 완전한 탑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탑의 수난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광국사탑은 일제에 의해 반출된 뒤 서울 명동과 경복궁 등 이곳저곳을 떠도는 파란만장한 여정을 거쳤어요. 10여 차례나 해체되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고난도 겪었는데요. 원래 있던 원주를 떠나 서울, 오사카, 경복궁,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 등으로 옮겨 다녔죠. 과연 100여년의 세월 동안 지광국사탑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명동에 있을 당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사진=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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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59호인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984∼1067)의 사리와 유골을 모시는 탑이에요. 고려 때인 1085년 건립됐죠. 독특한 구조와 빈틈없이 채워진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 있고 화려한 고려시대 승탑의 백미로 손꼽혀요. 탑의 일생이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탓에 비운의 탑으로도 불립니다.
원주 법천사지에 세워진 탑의 운명이 기구해진 건 우리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면서부터예요. 1911년 한 일본인이 이 탑을 해체해 서울로 옮겼어요. 탑은 그해 서울 명동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일본인 사업가 와다 쓰네이치의 서울 남창동 저택 정원으로 또 한 번 옮겨졌죠. 1912년에는 일본 오사카에 사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에게 팔리면서 일본으로 반출됐어요.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령으로 다시 국내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법천사지가 아닌 서울 경복궁에 놓였죠. 당시 자료들을 보면 탑은 경복궁 안에서도 계속 이동을 했어요.
6·25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크게 파손되는 아픔도 겪었어요. 당시 피폭으로 탑의 상륜부와 옥개석은 1만 2000여 조각으로 쪼개졌어요. 탑은 한동안 방치되다 1957년에 급하게 복원됐는데요. 치밀한 고증 없이 복원이 진행된 탓에 사실상 시멘트를 곳곳에 바르는 수준이었죠. 이후 1990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경복궁의 국립고궁박물관 뒤뜰로 이전해 2015년까지 자리를 지켰어요.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16년 지광국사탑을 완전 해체해 대전으로 이송한 후 2020년까지 과학적 조사와 보존처리를 진행했어요. 레이저로 표면 오염물을 제거하고, 섣부른 복원 작업을 하며 쓰인 모르타르를 걷어내는 등 원형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죠. 특히 사라져서 찾을 수 없게 된 부재는 원래 탑이 있던 법천사지 인근 유사 암석으로 사용해 원재료에 가깝게 복구할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탑이 움직인 거리를 따져보면 총 1975㎞에 이릅니다. 이번 귀향으로 고된 타향살이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됐는데요.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으로 이송된 지광국사탑 부재는 복원 위치가 확정될 때까지 기획전시 공간에 상설 전시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 해체 전 경북국경내에 있던 지광국사탑(사진=원주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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