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백년전쟁 때 영국 군대에 포위당한 프랑스 칼레시를 구하기 위해 6명의 시민 대표가 목숨을 바쳤다는 숭고한 정신을 담아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칼레시의 지도자급 인사 6명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요구대로 나머지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교수형을 각오하고 목에 밧줄을 감은 상태로 에드워드 앞에 섰다.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쳐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출발점이다.
우리 사회가 1인당 국민 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는 5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건강한 부자와 사회 각 분야의 모범적인 지도층이 늘어나야 한다는 시각이 최근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국격을 높여야만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얘기다.
‘재벌이나 부자들은 정당하게 노력해서 돈을 번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일반국민 10명 중 8명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 연구소의 조사 결과다. 부자로 상징되는 재벌총수에 대해서도 ‘독단·권위’, ‘부도덕’, ‘호화생활’ 등 부정적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렸다.
선진국에는 이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62년째 재위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45년 세계 2차대전 당시 군용 트럭 운전사로 참전해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왕가의 전통을 확립했다. 22년째 전 세계 부자순위 1위인 빌 게이츠는 부자보다는 통 큰 기부를 실천하는 ‘자선사업가’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이 선진국으로 대접받는 것은 단순히 소득수준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부문화와 청빈한 삶, 박애 정신을 강조한 초기 청교도의 종교적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워런 버핏, 빌게이츠, 마크 저커버그는 기업가란 이름 외에 ‘기부왕’이라는 또 다른 타이틀이 있다.
우리 사회에 ‘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미 새싹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대기업 총수로는 처음으로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이 개인자격으로 2000억 원 상당의 전 재산을 통일기금으로 기부해 국민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구순의 나이에 1조 원 교육재단을 꿈꾸는 이종환 삼영화학 명예회장도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각종 재단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대기업 외에 벤처 1세대인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등 한국의 신흥부자들도 ‘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단순히 부자들만의 나눔만으로는 ‘양극화’ 해소는 물론 선진국 진입도 요원할 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확산이 절실하다.
올해로 창간 15주년, 신문창간 3년을 맞은 종합미디어 이데일리는 대한민국이 ‘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선진사회를 이끌 수 있는 어젠다를 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