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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심사위원] 무겁고 비장미가 넘쳤다. 애잔하면서도 비통하다. 비극적 서사가 관통하는 가운데 스펙터클한 장면이 묘한 전율을 안겨준다.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그대, 논개여’가 올해 국립레퍼토리시즌 마지막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 2000년 20분짜리 소품으로 시작한 작품이다. 특히 지난해에 안무가 윤성주가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후 70여분에 달하는 대작 무용극으로 완성해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대, 논개여’는 역사적 팩트에 대한 재해석으로 관심을 모았다. 작품은 역사 속 의기(義妓) 논개와 그녀가 끌어안고 투신한 왜장이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허구적 상상에서 출발한다. 증오와 적개심에서 만난 적국의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은 신선하다. 논개와 왜장의 복잡다단한 심리와 내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분신을 등장시킨다는 점도 흥미롭다. 두 인물의 4각 구도를 통해 비극적 서사는 보다 긴장감 있게 그려진다.
역시 장윤나다. 논개를 연기한 스타무용수 장윤나의 눈부신 성장을 재확인한다. 애잔하면서도 처절한 슬픔을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솜씨가 놀랍다. 테크니컬한 몸짓, 성숙된 내면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왜장 이정윤도 국립무용단 간판스타답다. 강인한 무사적 카리스마와 여인을 향한 연민이 교차하는 내적 갈등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다. 논개와 왜장의 분신으로 등장한 장현수·조용진 또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잘 살렸다. 시인 역으로 발탁된 신예 황용천은 자유로운 영혼을 탐하는 시인의 감성을 무난하게 소화해 눈도장을 찍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료는 훌륭한데 재료를 활용한 상차림이 다소 빈약한 느낌이다. 특히 작품에 사용된 춤어휘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무대구성은 다소 산만했다. 군더더기를 없애고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 논개여’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무용극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이다.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 송범에 의해 무용극의 토대가 마련됐다. 바통을 이어받은 국수호는 신무용과 한국창작춤이 혼재된 이른바 춤극을 통해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구현했다. ‘그대, 논개여’는 무용극 형식과 이미지무용의 절충형으로 꾸며졌다. 모던한 스타일로 기존의 무용극과 차별화를 시도했다고나 할까. 무용극의 미학적 지평 확산과 한국 창작춤의 레퍼토리화 가능성을 탐색했다는 점에서 ‘그대, 논개여’는 충분히 재음미의 가치가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