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부근에 본사가 있는 산돌커뮤니케이션의 석금호(59) 대표는 회사 존속의 필수조건으로 직원들의 행복을 첫손에 꼽았다. 석 대표가 직원행복을 위해 실천하는 ‘펀(Fun) 경영’의 한복판에는 ‘업(業)에 대한 사명감’이 자리하고 있다.
석 대표는 “펀 경영을 실천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직원마다 회사에서 맡은 일 자체에서 사명감을 갖게 될 때가 가장 효과적이다”면서 “그 사명감은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석 대표 자신부터 지난 1984년 한글 폰트 개발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산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한글폰트 개발업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폰트를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모두 수입해 사용하는 걸 보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창업에 나선 것이다.
사업 초기부터 이익을 내기보다 ‘한글의 계승· 발전’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회사를 시작하다보니 사업이 제대로 굴러갈리 만무했다. 석 대표는 “당시 한글 폰트를 돈을 주고 사용하겠다는 수요 자체가 없어 사업초기 몇 년간은 수익은 커녕 매출조차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며 “3년간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떼우며 한글 폰트는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텨냈다”고 회고했다. 그야말로 일본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한글폰트 시장의 ‘독립운동’이었다. 그 때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 전까지 이 회사 창립기념일인 4월15일에는 어김없이 ‘라면 잘 끓이기“ 대회를 사내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현재 한글 폰트시장은 300억원 규모지만 시장은 정체되어 최근 몇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직원 46명 규모인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30억원을 거뒀다. 매출의 절반은 기업전용 한글폰트 개발에서, 나머지 절반은 일반 폰트 라이선스를 통해 올리고 있다.
한글 폰트에 관한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 회사는 지금까지 모두 600여개의 다양한 한글 폰트를 개발했다. 개발한 대표적 한글 폰트로는 본고딕, 산돌제비체, MS 맑은 고딕, 네이버 나눔고딕, 현대카드 U&I체, LG(003550)그룹에서 사용하는 산돌고딕네오, 삼성그룹 전용 서체 등이 있다. 국내에서 사용되는 한글 폰트 가운데 약 20%는 이 회사가 내놓은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월정액을 내면 이 회사가 개발한 모든 한글 폰트를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하며 제2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6개월 무상서비스 후 유료 전환예정이지만 석 달만에 2만5000명 가까운 회원을 모을 정도로 고객들에게 초기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석 대표는 “대다수 직원들은 회사의 이상적인 사업 모델에 끌려 들어왔다”며 “그러다보니 보수나 처우가 다른 디자인 업체에 비해 다소 떨어지더라도 일 자체에서 얻는 직원들의 만족도는 최고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사 전략기획팀 장현진 팀장은 “한글 폰트를 개발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희열은 다른 어느 회사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며 “직원 모두 자신들이 개발한 한글 서체가 이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국민들이 영원히 사용하게 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한글 서체를 개발할 수 있는 전문 디자이너는 국내에 통틀어서 100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귀한 존재다. 대학에서도 한글서체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과가 전무하다보니 스스로 연마해 터득하거나, 도제식으로 배울 수 밖에 없어 이 분야 전문가가 양산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교적 단순하게 작업할 수 있는 영어나 중국어와 달리 한글은 서체를 개발하기가 지구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자여서 어지간한 사명감이나 자부심없이는 이 분야에서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석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펀 경영의 중심에 놓고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이 분야에서는 정평이 나있다. 그러다보니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파격적인 서비스도 과감하게 내놓고 있다. 한글 폰트 무상지원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한글 폰트를 쓰고자 해도 금전적 여유가 없는 벤처, 중소기업들이 이 회사의 모든 한글 폰트를 조건없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면 개방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적 기업들과 대학생들에게도 예외없이 공짜로 한글서체를 지원한다.
석 대표가 직접 강사로 나서 ‘한글로 한국을 마케팅하자’라는 주제로 지난 10년간 매달 셋째주 목요일에 한번 씩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 강의를 지속해 온 것도 사명감에서다. 석 대표는 이 강의를 들은 수강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피부로 깨닫게 해줘 감사하다며 벅찬 감격을 얘기할 때 사업을 하는 보람을 가장 진하게 느낀다고 귀띔했다.
“회사가 수익을 내는 것은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지만, 사회에 기여를 하는 것은 더 중요한 기업 본연의 역할이다.” 석 대표가 회사 설립때부터 지금까지 변치않고 지키고 있는 초심이자 경영철학이다. 이 회사가 수익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것은 이 회사 고유의 기부문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산돌커뮤니케이션은 지난 2011년부터 매년 회사 순이익의 10%를 비영리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이전 20년간은 아예 회사 이익의 전부를 기부하는 경영원칙을 지켜왔다고 한다. 일반적인 기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영스타일이다. 이 원칙을 4년 전에 순익 10% 기부로 바꾼 것은 회사의 신규사업 확대와 연구·개발 강화 등을 위해 이익의 일정부분을 사내에 유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회사가 낸 수익의 일정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은 모든 면에서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특히 정직해야 한다.”
석 대표는 기업들이 끊임없이 법규를 위반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일상적인 현상이 된데 대해 “기업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글 지킴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똘똘뭉친 이 회사 직원들은 2년마다 한명도 빠짐없이 해외에서 4박5일 일정의 워크숍을 갖기도 한다. 올해도 지난 3월 필리핀 세부에서 모든 직원이 참여한 가운데 워크숍을 실시했다.
“해외 워크숍을 갈 때면 모든 직원들 얼굴에 그동안 볼수 없었던 반짝반짝하는 광채가 난다. 이때가 되면 한글 폰트 개발이라는 사명감아래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지만, 때때로 너무 힘든 일을 시키고 있지 않나 스스로 반성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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