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길의 뒷담화]예타 도입한 DJ·토건부양 거부한 노무현

1999년 예타 도입, 2007년 예타 강화
IMF 이후 방만한 공공투자 개혁 취지
노무현 “무리한 부양책 쓰면 훗날 위기”
29일 최대 40조 예타 면제, 후유증 우려
  • 등록 2019-01-29 오전 12:00:00

    수정 2019-01-29 오전 8:28:28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열린 차담회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시급한 지역 인프라 사업에서는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하는 트랙을 시행하고 있다”며 “원활하게 균형발전이 이뤄지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제공]
※모든 정책에는 그들만의 사연이 있습니다. 세종관가 이슈나 정책 논의 과정의 뒷이야기를 추적해 전합니다.


[세종=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2019년 1월29일은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날이 될 전망이다. 국책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총사업비 최대 61조원)를 무더기로 면제하는 사태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는 지역균형발전, 경기부양 효과가 있을 것이란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예타를 도입·강화한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경제정책 기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예타 시행, DJ·노무현 ‘재정개혁’ 취지

올해로 20년을 맞은 예타는 정부의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됐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정부는 1998년 초 ‘공공사업 효율화 추진단’을 꾸렸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투자사업의 방만한 운영·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등이 추진단의 주축이 돼 메스를 들었다.

당시 공공투자사업의 환부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예타 없이 각 부처별로 타당성조사만 이뤄지던 때였다. 이러다 보니 신청만 하면 일사천리로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이 통과됐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5년간 추진된 33건의 부처 타당성 조사 중 32건(97%)이 심사를 통과했다. 타당성조사를 통과하지 못한 1개 사업은 울릉도에 공항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주먹구구식, 나눠먹기식, 밀어붙이기식 사업 선정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후유증은 컸다. 경부고속철도건설 사업의 경제성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수요는 부풀려놓고 총사업비는 줄이는 방식으로 타당성 조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1983년, 1991년, 1995년, 1997년, 1998년 5차례나 진행된 타당성 조사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시화호건설사업, 청주공항건설사업도 똑같이 부실조사 논란에 휩싸였다.

김대중정부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는 제도 개선에 나섰다. 1998년 당시 기획예산위원장은 진념 전 경제부총리였다.

진념 전 부총리는 부처가 타당성조사에서 손을 떼는 방안을 개혁안으로 냈다. 부처들은 반발했다. 이에 진념 전 부총리는 부처의 타당성조사를 놔두되 KDI가 예비타당성조사를 하는 것으로 절충안을 냈다. 이후 1999년 1월부터 예타를 시행했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예타를 면제한 사업의 사업비가 박근혜정부 때보다 많았다. 현재 지자체가 면제가 신청한 사업의 총사업비는 61조원에 달한다. 면제 결과는 29일 발표된다.[그래픽=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이 같은 재정개혁 기조는 노무현정부 때도 이어졌다. 노무현정부는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2006년 10월 기금관리기본법을 폐지하고 국가재정법을 제정했다. 2007년에는 국가재정법(38조) 및 시행령에 예타를 처음으로 명시했다. 건설사업만을 대상으로 하던 예타를 연구개발사업, 정보화사업까지 확대했다. 이 같은 예타 법제화 조치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예타 강화에 나선 것은 경기부양용 토건사업의 후유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이렇게 밝혔다.

“당장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가 무언가 강력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또 야당은 당장 경기를 살려내라고 야단을 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를 살려내려면 무리한 부양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반드시 이후의 우리 경제가 다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것이 경제법칙입니다. 그래서 무리한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정말 힘겹게 버텼습니다.”

예타는 예산낭비 사업을 거르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KDI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된 예타 결과, 경제적 타당성을 확보한 사업은 전체 사업(690건) 중 327건(47.4%)에 그쳤다. 그대로 진행됐다면 예산낭비가 불 보듯 뻔했다. 예타를 통해 절감한 예산은 141조원(1999~2017년)에 달했다.

민주당 박근혜정부 땐 “예타 회피는 예산낭비”

현재 예타면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도 박근혜정부 시절엔 예타 강화를 주장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 백운광 연구위원은 2015년 8월11일 경제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 “예타는 재정지출 관리의 문지기(게이트키퍼)”라며 “예타 완화나 회피는 예산낭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기회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집권한 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 예타 면제는 예산낭비가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으로 둔갑했다. 17개 시도에 고루 나눠서 시행한다는 당근에 정치권에서 예타 반대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29일 최대 42조원의 예타 면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야권에선 예타 면제를 추진하려고 했다면 정권 초부터 계획을 세운 뒤 제도 개선을 거쳐 추진했어야 했다는 입장이다. 정권 초기 SOC 투자에 신중했던 정부가 무분별한 토건정책을 추진하는 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신영철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은 “성장률, 고용 부진이 계속되다 보니 예타 면제를 꺼내 들 정도로 문 대통령의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4대강 사업에서 봤듯이 예타를 무력화하면 혈세 낭비를 부르고 미래세대 부담만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는 29일 정부가 예타를 무더기로 면제하면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설 방침이다. ‘제2의 4대강’ 후유증이 우려된다.

[출처=‘KDI 정책연구사례 지난 30년의 회고’ 책, 한국행정연구원 ‘대한민국 역대 정부 주요 정책과 국정운영’ 책, KDI 예비타당성조사 제도의 이해 2016년도 용역 보고서]
[출처=국가재정법, 기획재정부 2018년도 예비타당성조사 운용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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