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이은주씨는 1993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17세 앳된 나이였다. 고온으로 반도체 칩을 가열해 조립하는 게 이씨의 일이었다. 작업장에서는 악취가 났다. 칩에 발린 에폭시수지 접착제가 타는 냄새였다. 여기에는 발암물질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하루 3교대로 일했다. 사람이 적으면 하루 12시간도 근무했다. 1997년 가을, 조장으로 승진하면서 일이 늘었다. 늘 수면부족과 피로에 시달렸다. 언젠가부터 자꾸 구역질이 났고 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이씨는 1999년 6월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나왔다. 입사한 지 6년2개월 만이었다. 이듬해 5월 난소 경계성 종양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았지만 2011년 11월 난소암으로 악화됐다. 결국 이씨는 이듬해 1월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이씨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볼수 없다는 이유로 산재보험 적용을 거부했다.
결국 법정다툼으로 비화된 이 사건에서 법원은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반도체 근로자의 난소암을 산재로 인정한 첫 판결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박연욱)는 지난 1월 이씨의 유족이 “유족급여를 지급하라”며 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일하면서 유해 화학물질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돼 종양이 발생했고 이것이 난소암으로 악화했다”며 “이씨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노출된 유해물질의 농도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면 유해성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산재보상보험제도는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공적(公的) 보험을 통해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사정을 열악한 지위의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변회와 이데일리가 뽑은 이달의 판결’ 선정 자문위원인 나현채 변호사(44·사법연수원 36기)는 “반도체 관련 사건에서 희귀하게 발병한 난소암을 산재로 인정하고 이 과정에서 근로자 측의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완화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통상 산재 사건은 피해근로자가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불리한 구조”라며 다른 사건에서 이 판결을 원용하기를 기대했다.
판결은 소송을 낸 지 2년5개월 만에 나왔다. 공단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유족은 서울고법에서 공단과 법정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지난 1월12일 재해예방대책을 마련했지만 사과와 보상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반올림 회원과 피해자 가족들이 지난 1월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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