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절차를 생략하거나 환경부를 다그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참여정부 때도 이런 사례가 있었던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제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더이상 이런 방식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7월에 펴낸 저서 ‘사람이 먼저다’에서 “대규모 사업일수록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 환경영향평가 등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문 대통령은 왜 예타를 강조했을까요?
예타 면제의 후유증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은 “개발 사업은 한번 진행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며 “환경 파괴 논란과 함께 지역 주민 간의 갈등, 지역 공동체 파괴와 같은 부작용들이 있어 왔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문 대통령은 4대강 사업에 대해 “세금을 낭비하면서 토건업자들의 배만 불려준 토목사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던 주장도 허구”라고 했습니다.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예타를 면제한 대표적인 국책사업입니다.
취임 이후 문 대통령의 생각이 바뀐 듯합니다. 정부는 16개 시도의 23개 국책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하기로 했습니다. 총사업비 24조1000억원 달합니다. 문 대통령이 맹비난했던 4대강 사업(22조원)보다 예산규모가 더 큽니다. 문 대통령은 예타를 면제한 이유에 대해 “원활하게 국토 균형발전이 이뤄지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면죄부를 부여했습니다.
예타 면제사업 균형발전점수도 낙제점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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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예타면제 사업에는 과거에 예타에서 탈락한 사업도 다수 포함됐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작성한 각각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사업별 예타 보고서에는 탈락된 사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습니다.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 측면에서 평가한 보고서입니다.
일례로 예타 보고서에 따르면 ‘울산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 사업(사업비 1조원)’은 종합점수(AHP)가 0.310에 불과했습니다. 100점으로 환산하면 31점입니다.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지수는 0.2350%로 2008~2010년 135개 예타 대상사업의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지수 평균(0.3431%)에도 못 미쳤습니다. 환경파괴 우려도 큽니다. KDI는 “토사유출, 비산먼지 발생, 가동장비의 소음·진동 등에 의한 주변지역 환경에 부정적 영향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남의 서남해안 관광도로 건설 사업인 ‘국도77호선(압해~화원) 건설사업(사업비 1조원)’의 종합점수는 0.354였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지수는 0.3164%로 2008~2010년까지 135개 예타 사업의 평균값인 0.3431%보다 낮았습니다.
경북의 동해선 단선 전철화 사업인 ‘포항~동해 전철화 사업(사업비 4000억원)’도 종합점수가 0.468에 그쳤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효과 지수는 0.1544%로 2008~2012년 철도사업 평균(0.6754%)보다 크게 낮았습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추진했던 ‘남부내륙선 철도건설사업(사업비 4조7000억원)’도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지수는 평균을 넘었지만 종합점수는 0.429에 불과했습니다. KDI가 검토한 모든 시나리오·대안(총 8개)에서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KDI는 “장대터널과 해상을 교량으로 통과하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업추진 시 예상되는 환경문제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며 “진주시내 및 일부구간에서는 정온시설(학교, 주거지, 축사 등)을 근접해서 노선 계획이 되고 있으므로 소음·진동 등에 대한 영향에 대한 검토를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습니다.
文 대통령 “사업 추진 과정, 국민에게 평가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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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행 예타 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경제성 평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인구가 적은 지방은 낮은 점수를 받게 돼 예타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기재부 2018년도 예비타당성조사 운용지침에 따르면 현행 예타 평가요소는 경제성(35~50%), 정책성(25~40%), 지역균형발전(25~35%)입니다.
그렇다면 예타 제도부터 개편했으면 어땠을까요? 경제성 점수를 낮추고 지역균형발전 점수를 높이는 방식입니다. 재작년 정부 출범 당시 예타 제도부터 개편한 뒤 지역 숙원사업을 추진했다면 절차상 논란이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하지만 2년 전 문재인정부 출범 당시엔 예타 관련한 면밀한 준비는 없었습니다. 홍 부총리는 “(예타 면제는) 작년 하반기에 이 문제가 제기돼서 검토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예타의 핵심은 경제성 평가”라며 “예타 제도를 개편했더라도 이번에 면제된 사업들이 예타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이번에 예타를 면제한 사업은 부실 우려가 크다는 뜻입니다.
이제와서 예타면제 사업을 백지화하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앞으로 관건은 후유증을 줄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갈등, 환경 파괴, 혈세 낭비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해답은 이미 문 대통령도 알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방안은 투명한 여론 수렴입니다. 문 대통령은 저서에서 “사업 계획이나 추진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국민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며 “새로운 정부는 이제 정보제공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면제된 사업들은 이르면 내년도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국고지원 규모가 논의됩니다. 올해 상반기부터 절차가 진행되는 셈입니다. 사업은 최장 2029년까지 연차적으로 추진됩니다. 10년 간 국민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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