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 양의 시신은 겉옷만 걸친 상태였고, 다음 날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유족들이 정 양의 속옷을 발견하는 등 성폭행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채 그해 12월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을 내렸다.
유가족은 성폭행 후 교통사고로 위장한 성폭행 치사를 주장하며 속옷 감정을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 속옷에 대해 나이 든 여성이 입는 속옷이라며 대학교 1학년이 입는 속옷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유가족의 요청을 묵살했다. 이런한 가운데 A씨는 같은 해 12월 21일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 이른바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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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총여학생회장 역시 힘을 보탰다. 그는 “새내기 여대생이 속옷이 벗겨진 차림으로 새벽녘 고속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면 상식적으로라도 단순 교통사고로 보기에 어렵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경찰은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99년 3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 양의 속옷을 감정 의뢰하고 속옷에서 정액을 검출했지만, DNA는 발견하지 못해 신원 확인에 실패했다. 이후 추가 단서가 없어 수사는 진척되지 않았고, 경찰은 이 사건을 미궁에 빠뜨렸다는 여론의 질타를 피하지 못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정 양의 직접 사인은 교통사고로 했으나 정양의 사고 전 6시간 동안의 행적은 현재 수사 중이다”라고 밝혀 타살 가능성을 언급했다. 단순 교통사고 처리에서 타살 등 수사가 필요한 사건으로 전환된 것이다.
검찰은 추가 수사를 통해 정 양이 B씨를 비롯한 스리랑카인 세 명으로부터 번갈아 몹쓸 짓을 당한 뒤 고속도로로 달아나다 변을 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렇게 2013년 9월 B씨를 구속 기소했으나, 나머지 2명은 불법체류로 이미 추방된 상태였다.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고려해 B씨 등이 정 양을 성폭행하고 소지품을 훔쳤다며 공소시효(15년)가 남은 특수강도강간죄를 적용했다. 강간죄 공소시효 5년이 2003년에, 특수강간죄 공소시효 10년이 2008년에 각각 지난 데 따라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죄를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1심은 B씨가 정 양의 가방 속 현금, 학생증, 책 등을 훔쳤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당시 국내에 머물던 스리랑카인을 전수 조사한 끝에 B씨의 공범으로부터 범행을 전해 들었다는 증인을 찾아 항소심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2심은 B씨의 성폭행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증언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2년여의 심리 끝에 지난 2017년 7월 2심 결론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B씨는 2013년 다른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와 2008∼2009년 무면허 운전을 한 별도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돼 강제 추방이 결정됐다.
결국 스리랑카 측도 수사팀을 국내에 파견해 참고인 조사를 벌이는 등 협조한 끝에 B씨를 현지 법정에 세우게 됐다. 스리랑카 법으로도 공소시효를 4일 남겨 두고 기소한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검찰은 B씨의 DNA가 피해자의 몸이 아니라 속옷에서 발견됐으며, 강압적 성행위를 인정할 증거가 없는 등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성폭행이 아닌 성추행 혐의로만 기소했다. 스리랑카 형법에 따르면 성추행 죄는 징역 5년 이하로 돼 있다.
앞서 지난 2000년 유가족은 담당 경찰관 등을 직무유기로 고소했지만 각하 처분을 받았다. 이어 2001년에는 경찰관 등에 대한 불기소 처분에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그러나 유가족은 다시 한번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오랜 싸움 끝에 지난 2021년 최종 승소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초동 수사가 부실했다는 걸 재판부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경찰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성급히 판단해 현장조사와 증거 수집을 하지 않고 증거물 감정을 지연하는 등 극히 부실하게 초동수사를 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저히 불합리하게 경찰의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위법하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