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이 죽었다"…살인자와 함께한 나흘간의 '죽음의 항해'[그해 오늘]

2016년 6월 20일 사건 발생
원양어선 ‘광현803호’ 살인사건
베트남 선원, 한국인 선장·기관장 살해
  • 등록 2024-07-01 오전 12:00:10

    수정 2024-07-01 오전 12:00:10

[이데일리 채나연 기자] 2016년 7월 1일 인도양 참치잡이 원양어선 ‘광현 803호’ 한국인 선장과 기관장이 싸늘한 주검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참치를 잡기 위해 5개월 전 배를 타고 부산항을 떠났던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상살인 사건사건이 발생한 부산 광동해운 소속 참치잡이 광현 803호(138t) 원양어선.(사진=연합뉴스)
사건은 2주 전에 발생했다. 인도양 등지에서 참치를 잡던 ‘광현 803호’ 한국인 선장 양모(42)씨는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전날 선상 회식을 열었다.

회식에는 선장을 포함한 한국인 기관장(41), 베트남 선원 4명, 인도네시아 선원 5명 등 총 11명의 선원이 참여했다. 이들은 양주 5병을 마시며 저녁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기관장이 회식 도중 베트남 선원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베트남 선원 A(32)씨는 기관장이 종종 “그럴 거면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가끔은 좋지 않다”고 답변했다.

A씨의 답변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급변했다. 화가 난 기관장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으며 베트남인 선원 B(32)씨는 선장에게 베트남어로 ‘건배’를 뜻하는 “YO(요)”와 “Captain Very Good”을 조롱하는 말투로 이어갔다.

선장은 이를 멈출 것을 지시했지만, 이들이 이 같은 말을 계속하자 본격적 다툼이 시작됐다. B씨는 선장의 뺨을 2차례 때렸으며 이를 말리는 동료 선원들도 폭행했다.

이에 선장이 선원 전부를 집합시켰다. 그러자 B씨는 식당에서 흉기를 챙긴 뒤 “선장을 죽이겠다”며 나머지 베트남 선원 5명에게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겁을 먹은 나머지 베트남 선원들은 B씨가 챙긴 흉기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한편 B씨의 흉기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A씨는 식당으로 가서 그곳에 보관된 흉기를 챙겨 선장과 B씨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때 선장과 B씨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보게 되자 A씨는 흉기로 선장을 무참히 살해했다.

범행 후 A씨는 곧바로 기관장의 침실로 이동해 기관장 또한 무참히 살해했다.

원양어선 ‘광현 803호’(138t) 선상살인 사건을 재현하는 베트남 선원과 항해사.(사진=연합뉴스)
당시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다른 베트남 선원은 근무를 마치고 선실에서 쉬고 있던 한국인 항해사 이모(50)씨 방으로 달려가 선상에서 누군가 죽었음을 알리는 말인 “산타마리아”라고 외쳤다.

소식을 들은 이씨가 갑판으로 뛰쳐나오자 A씨와 B씨는 흉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태권도 4단, 합기도 2단 등 상당한 무도 실력을 갖고 있던 이씨는 흉기를 빼앗고 이들을 제압했다.

이씨는 범인들을 격리시킨 뒤 “선장과 기관장이 살해당했다”며 부산에 있는 선사에 통보하고, 침착하게 선장의 직무를 대행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인도양 세이셸 군도 인근 해상.(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해역은 육지와 1천km 떨어진 곳에 있어 가장 가까운 빅토리아항까지 평균 속도로 달려도 3~4일의 시간이 소요됐다. 망망대해에서 한국인 선원을 모두 잃은 이씨는 4일간 배를 안전하게 몰고 가기 위해 흉기에 다친 B씨의 손을 치료해주고 평소와 같이 다 함께 식사하는 등 일상적인 선상생활을 이어가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로 인해 4일간 남은 선원들의 특별한 동요 없이 광현호는 빅토리아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세이셸에 먼저 도착해 배를 기다리고 있던 수사팀은 배에 기습적으로 올라타 광현호를 장악하고 A와 B씨의 신병을 확보한 뒤 이들을 국내로 압송했다.

이후 살인과 특수폭행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진 A씨와 B씨는 “계속 말썽을 부리면 하선시키겠다”는 선장의 말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배에서 강제로 내릴 경우 월급은 물론 이들이 승선하기 전, 인력 송출회사에 맡겨놓은 돈 300만 원까지 못 받게 된다는 압박감이 범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는 주범 A씨에게 무기징역, B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선장과 기관장을 연달아 무참히 살해하는 등 범행 결과가 매우 중대하고 범행 내용이 반인류적이며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장에 대한 살해 범행은 그 자체로 죄질이 매우 중하다”며 “범행 수법도 매우 잔혹하고 선장을 살해한 후 별다른 이유 없이 자고 있던 기관장까지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 범행으로 피해자들은 크나큰 고통 속에서 숨졌고 유족들은 큰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겪게 됐는데도 피고인이 피해 회복 조치를 하거나 피해자 측으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심도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된 상태에서의 수감생활을 통해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원심 판결에 잘못이 없다”며 1심 판결을 유지했다.

A씨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판단해 상고를 기각, 형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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