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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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19살의 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흘러야 했다. 그녀는 도무지 뜻도 문맥도 맞지 않은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 자신도 모를 의미를 담아 불러야 했던 이유는 일제 검열 때문이었다.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였다. 일제에 의한 대표적인 ‘가요 수탈 사건’이었다. 8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국민가요로 불려온 ‘목포의 눈물’에 감춰진 이야기다. 목포에는 이런 이야기가 숱하게 많다. 목포를 근대 보고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이야기를 찾아 목포로 향한다.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한 유달산 노적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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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적봉이 노인봉이라 불린 이유
| 유달산 등산 중에 바라본 ‘목포의 눈물’ 노리배와 바다 너머의 삼학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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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은 목포의 상징이다. 신선이 춤추는 모습이라고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발 228m의 낮은 산이지만, 어느 산 못지않게 웅장한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목포 사람들은 유달산을 영혼이 깃드는 곳이라고 믿는다. 유달산 일등바위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심판하는 장소. 이때 심판받은 영혼은 이등바위에서 머물다가 그 결과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극락으로 가는 영혼은 목포 앞바다의 ‘삼학도’에 사는 학을 타거나, ‘호하도’ 용머리에 사는 용을 타고 떠난다.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유달산 거북바위에 사는 거북이를 타고 간다는 이야기다.
유달산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대중가요비로는 최초다. 그곳에는 이난영 특유의 구성진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목포는 이 노래비를 세운 후 국적불명의 노래가사도 원래대로 수정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이난영이 노래한 유달산과 노적봉은 제 모습을 잃었다. 유달산 노적봉에 숨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한 지형지물이었다. 이 둥글게 솟아오른 노적봉 바위에 이엉을 둘러 군량미로 위장했다. 이를 바다에서 바라본 왜적들은 커다란 노적가리로 본 것이었다. ‘저렇게 큰 노적가리 군량미가 있다면 조선의 군사가 얼마나 많을까’라며 겁을 먹고 퇴각했다는 일화다. 그렇게 300년이 지나 일본은 이 노적봉에 전해지는 ‘왜군 도주설’을 희석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적봉을 지도나 문헌에 ‘노인봉’(老人峰)이나, ‘노인암’(老人岩)으로 표기했을 정도였다. 조선의 기를 어떻게든 죽이려 한 당시 일본의 태도에 비춰보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유달산 훼손이 더 심각해졌다. 일본 불교의 부흥을 위한다는 이유로 유달산 88곳에 흥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설치했다. 지금은 일등바위 암벽에 새겨진 흥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곳곳에 이들의 상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일본 신사까지 유달산에 세워 조선의 국운을 막으려 했다.
|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새겨진 흥법대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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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목포’
목포는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목포 오거리’가 경계의 중심이었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조선인 구역과 일본인 구역으로 나눴다. 특히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의 남촌은 적산가옥(敵産家屋)과 일본풍 건축물이 밀집해 있었다. 목포 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필두로 식민지 시대에 지은 관공서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골목에는 크고 작은 적산가옥과 상가건물도 즐비하다. 개발지체로 남아있던 이 공간을 지난 8월 ‘근대역사문화공간’이란 이름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가 된 곳이 특정 건물들이 아니라 구획된 공간이다. 문화재청은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 11만 4602㎡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했다.
| 구 목포일본영사관 건물인 목포 근대역사관 1관 건물.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일본의 영사업무를 위해 1908년 건립한 영사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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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아래 자리한 구도심은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다. 당시 일본은 목포를 전략적으로 침탈했다. 목포는 한반도의 남쪽 끝이자 서쪽 끝이어서다. 이에 일본은 목포를 부산과 함께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일본 영사관은 물론 동양척식주식회사도 이때 들어왔다. 근대사의 모습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옛 일본영사관 건물이다. 목포 최초의 서구식 건물로 1900년대 들어섰다. 건물 정면에는 당시 일본 주거지와 항구가 내려다보이고, 유달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풍수지리를 몰라도 ‘명당’소리가 나올만큼 전망 좋은 곳에 들어서 있다. 광복 후에는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목포근대역사1관으로 쓰고 있다. 전시실에는 목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7개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건물 뒤편에는 태평양전쟁에 대비해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도 있다. 길이만 무려 82m에 달한다.
이곳에서 170m 정도 떨어진 목포근대역사2관은 일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었다. 1층과 2층 전시장은 일제강점기 목포의 모습과 일제의 침략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이었던 ‘목포문화원’, 1930년대 일본식 정원인 ‘이동훈정원’,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이었던 ‘창작센터 나무숲’, 화신백화점 등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 구 회신백화점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영자화실 건물. 일제강점기 당시 목포 지역에서 동아부인상회와 함게 대표적인 판매시설로서 당시 건물로서는 특이하게 철근콘트리트 라멘조로 건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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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내화 목포공장의 내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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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전성기를 기억하다 ‘조선내화’
가장 눈길을 끈 근대유산은 온금동의 ‘조선내화 목포공장’이었다. 목포에서 가장 부자로 불렸던 이훈동이 운영한 공장이다. 지난해 1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선내화는 용광로 내부에 들어가는 내화벽돌 등을 굽던 공장. 1938년 일본이 전쟁에 대비해 무기용 철 생산을 위해 세웠다. 1947년 지금의 조선내화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체철·철강·유리·시멘트 등 다양한 내화물 제품의 생산을 위해 건물을 확장했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리다 공장 이전으로 1997년 문을 닫았다.
조선내화에 대한 목포사람들의 기억은 더욱 각별하다. 보해양조, 행남사와 함께 목포 3대 기업으로, 목포 경제의 한 축을 맡을 정도로 큰 기업이었다. 조선내화 공장 뒤쪽의 산동네 마을은 순전히 조선내화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조선내화 목포공장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에는 무려 500명의 직원이 옮겨왔다. 이후 공장 뒤편에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 공장은 말 그대로 폐허다. 그마나 천장의 철골 트러스 구조가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뽐내고 있을 뿐이다. 일부 공장 건물은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삭은 지붕을 다 걷어내고 푸른색 비닐을 덮어 높았다. 기계를 바치던 목재 버팀목은 물론 굴뚝까지 담쟁이 넝쿨이 친친 감았다. 조선내화는 이 공장을 복합예술문화단지로 보존 활용하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공장의 뼈대와 외형은 되도록 그대로 둔 채 조선내화 역사관과 기념관을 비롯해 공방, 카페, 갤러리, 전망대 등을 배치하기로 했다.
| 조선내화 목포공장의 내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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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잠잘곳= 목포의 하당신도시에 호텔들이 몰려있다. 상그리아 비치호텔, 폰타나비치관광호텔, 유토피아가족호텔, 샤르망호텔, 시월애호텔 등이 있다. 유달산 아래 유달유원지 부근의 신안비치호텔도 오래되긴 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먹을곳= 목포는 음식의 고장이다. 목포에는 ‘5미(味)’도 있고 ‘9미(味)’도 있을 정도로 먹거리가 많은 곳이다. 온금동의 선경준치횟집은 준치회비빔밥과 아귀탕이 별미다. 특히 가시가 많은 준치를 잘게 썰어서 채소와 고추장에 무치면 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다. 조기구이·갈치구이·병어찜 등 구이·찜류와 마른우럭맑은탕 등도 낸다. 하당로에 있는 명인집은 간장게장 정식이 유명하다.
| 선경횟집의 준치회무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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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집 간장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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