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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지난해 가을쯤으로 기억합니다. 정치권을 취재했을 때인데, 이듬해 총선 민심을 미리 훑어보고자 영·호남 르포를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염두에 둔 상징 정치인이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전남 순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최고위원(대구 수성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정치권 인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정현과 김부겸은 다르지. 김부겸은 실력으로 뚫은 게 맞는데, 이정현은 아니야. 저번 재보선 때는 어부지리였다고.” 그러니까 이정현 의원이 지난 2014년 7·30 재보선 때 이긴 건 상대 야당 인사끼리 불화가 심해 표가 갈라졌기 때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야당의 공천 실패 덕이었다는 거지요. 이 인사는 “호남이 만만한 곳이 아니다”면서 “총선 때는 당선되지 못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럴 듯한 논리지요. 이 의원은 7·30 재보선 전에도 “설마 당선될까” 하는 의구심을 받았는데, 이번 총선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당 후보에 뒤졌습니다.
부지런히 유권자 마음을 산 이정현
여의도에는 자칭 정치 전문가들이 넘칩니다. 그렇게 풀어진 ‘썰’이 종종 삽시간에 퍼집니다. “얘는 여기서는 안 돼.” “한번 보라고. 각이 나오잖아.” 이런 식입니다. 물론 오랜기간 정치적 내공과 감각이 바탕이 돼 내려진 결론이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그런 예측들이 맞는 경우도 많이 봤지만 틀린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특히 이번 총선은 그 결정판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전문가가 새누리당이 원내 1당을 내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까.
정치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직업입니다. 어떻게든 알게모르게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직업입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의 매력. 우리는 그걸 정치력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아직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절절이 와닿는 게 이번 총선이었습니다. 심판론 같은 이유가 있지만 정치인들은 아마 거대한 벽 앞에 선 심정일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답은 일단 ‘겸손’인 것 같습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공감대, 또 그걸 위한 성실함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꼽는 ‘이정현식(式) 지역구 관리’의 요체입니다. 이번 총선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선거를 마치 과학인 양 접근하는 그 태도부터 회초리를 맞은 겁니다. 이정현 의원이 당선 후 “국민이 무섭다”고 하더군요. 다른 인사들은 오죽했겠습니까.
경제심리 읽는데 애 먹는 정책당국
경제계 인사들도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정책당국은 당혹감 그 자체였습니다. 덩달아 변화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또다른 측면의 교훈도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경제의 기본 작동원리는 ‘가격’입니다.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이뤄집니다. 그렇다면 수요와 공급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그 원인을 쭉쭉 찾다보면 약간은 허무한 결론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어떤 상품이 갑자기 좋아보이고 주변에서 사기 시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대출 받아서 사려고 하고, 그에 맞춰 또 기업은 공급량을 늘리고, 가격은 다시 올라가는 겁니다. 이를테면 전셋값이 치솟는 건 월세 내기 싫으니 전세만 찾고 그런 사람들이 덩달아 많아지는 이유 때문이지요. 반대로 소비자가 지갑을 닫겠다고 마음 먹으면 가격은 떨어집니다. 채권 외환 주식 등 금융상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수식과 이론이 경제학을 수놓지만 결국 그건 사람들의 심리가 바탕인 겁니다.
정책당국이 해야 할 역할은 자명합니다.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성장을 도모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경기를 조절하는 겁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책당국이 최근 큰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합니다.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하지요. 중앙은행을 예로 들어볼까요. 중앙은행은 쓰던 돈을 안 쓰게 하는 ‘인플레 투사’로서 과거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안 쓰는 돈을 쓰게 하는 ‘디플레 투사’로서는 낙제점입니다. 기준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재정을 아무리 풀어도 사람들이 돈을 안 쓰는 시대입니다. 고민이 클 겁니다. 표심(票心)처럼 움직이는 경제심리를 도무지 통제할 방법이 없으니깐요.
“경제학이 과학이 되는 건 불가능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경제학강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의미의 과학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략) 경제학 이론들은 각자 초점을 맞추는 분야에서마저 실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예측하는데 계속 실패해 왔습니다. 화학에서 다루는 분자나 물리에서 다루는 물체와는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책당국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읽는데 소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굳이 이정현 의원의 당선 이야기까지 안 하더라도 말이지요. 경제지표가 연일 고꾸라지는 요즘입니다. ‘경제학자보다 심리학자가 더 필요하다’는 쓴소리를 당국은 새겨듣길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경제뉴스를 보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jungkim@edaily.co.kr로 보내주세요. 부족하지만 최대한 답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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