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그 여인의 짝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들렸던 사랑고백, 몇 년 전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 대사 중 하나다.
갑자기 그 대사가 ‘네 앞에 나 있다’로 변신해서 머리 속에 뛰어 든 것은 라운드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부터였다. 드라마의 그 장면처럼 누군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면 ‘필드의 연인’이라는 또 다른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머리 속에 떠오른 그 말의 뉘앙스는 180도 달랐다. 굳이 만든다면 ‘그린의 웬수’쯤 될라나.
처음에는 자신의 골프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남들 움직임에 영향 받지 않으며 언제나 신중하고 침착하게 샷하는 것을 보면서 배울만하다 싶었다. 특히 퍼팅 라인을 꼼꼼하게 살피고, 실패할라치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는 ‘진지하기도 하셔라’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한 홀, 두 홀 지나니 이건 좀 아니었다. 신중하고 진지한 것이야 뭐라 할 것이 없는데 마치 저 앞의 골인 지점만 보게 눈 양 옆에 가림막을 쳐 놓은 경주마처럼 도통 주변 상황을 살필 줄을 몰랐다.
자신의 공이 놓인 곳과 홀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그린을 종(縱)으로, 횡(橫)으로 돌아 다니는 것은 좋지만 퍼팅 라인 살피려고 앉아 있는 동반자 앞으로 쓱 지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남의 퍼팅 라인을 살포시 밟아 주기까지 하는 무 매너는 어쩌란 말인가.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남의 퍼팅 라인을 밟았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과를 할 리도 만무했다.
홀에 좀 미치지 못하거나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 버디 못 잡은 것은 같이 안타까워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잡은 파 세이브 기회 한번 살려보겠다고 자기 퍼팅 차례 기다리던 동반자를 무시한 채 곧장 퍼터로 공을 끌고 원위치로 돌아가 다시 퍼팅을 하면 어쩌란 말인가.
‘네 앞에 나 있다!!!’를 외치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일부러 동반자 퍼팅라인 밟고 그림자 드리워 살랑거리며 신경 거스르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몰라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을 것이다. 급하게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퍼팅했던 것은 다른 동반자들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무슨 청문회도 아니고 이런 ‘모르쇠’ 행동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슬쩍 넘어가질 일이 아니다. 동반자들이 처음에는 ‘어쩜 그렇게 신중하세요, 배워야겠어요’ ‘호호 하하’하면서 넘어가도 몇 차례 계속되면 ‘라운드 동반 불가’의 철퇴를 내릴 수도 있을 만큼 중대 과실이다.
퍼팅을 하려고 자세를 딱 잡으면 공만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눈은 경주마의 그것과는 달라서 앞을 보고 있어도 양 옆으로 어느 정도는 다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때문에 퍼팅 어드레스 때 뒤편에서 얼쩡거리면 의도했든 아니든 방해꾼의 오명을 피할 수가 없다.
골프장에서 골퍼가 쓰러지면 십중팔구는 그린 위에서라고 한다. 그만큼 퍼팅할 때 신경이 곤두선다는 뜻이다. 그러니 동반자 혈압 오르게 만들지 말자. 동반자가 퍼팅라인 살피면 귀찮더라도 그 뒤로 꼭 돌아다니고, 혹시 퍼팅 라인위로 건너가게 되면 되도록 보폭을 크게 해 건널 것이며, 행여라도 퍼팅할 때 뒤쪽에 서게 되면 얼른 더 옆쪽으로 비켜 눈에 들지 말 것이다.
내 그림자가 동반자의 퍼팅라인 위에 길게 드리워진 것을 발견했는데 그가 막 퍼팅을 하려고 하면 어쩔 것인가. 그림자를 치우기는 너무 늦어버린 순간. 그때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 “그대로 멈춰라.”
눈에 들어가도 움직이지 않으면 무 매너 동반자 소리는 면할 수 있다.
▶ 관련기사 ◀
☞양용은 우승, 스포츠 역사상 3대 이변
☞(톡톡 골프)봉팔씨 골프
☞''호랑이 잡았다'' 양용은, PGA 메이저대회 우승 쾌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