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인 | 이 기사는 11월 02일 08시 51분 프리미엄 Market & Company 정보서비스 `마켓 인`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
[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신용평가사는 그래도 자료를 달라고 하면 받을 수나 있죠. 저희 같은 애널리스트들만 죽어나게 생겼어요. 에휴~~~ㅠ.ㅠ”
크레딧 애널리스트 경력 5년차 A씨는 오늘도 책상에 수북이 쌓인 페이퍼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이 코앞에 닥쳤지만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기존 회계방식(K-GAAP)보다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며 `원칙(Principle)`만 제시해 업무부담이 몇 갑절 늘어난 것도 그렇지만, 기업들이 IFRS를 핑계 삼아 제대로 된 재무정보를 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탓이다.
특히 크레딧 평가의 `핵심`인 운전자본(Working Capital)이나 금융상품 등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주식투자 등 에쿼티 쪽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가 기업의 `이익`이라면, 크레딧 파트의 핵심은 기업의 `채무상환능력`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지, 얼마나 빨리 매출채권을 회수하고, 매입채무를 늘리느냐(운전자본)에 따라 기업의 현금흐름과 차입금 구조는 180도 바뀌게 된다.
IFRS 도입 취지는 글로벌 비교분석이 가능한 회계로 작성하자는 것이다. 또 기존 규칙(Rule) 위주의 K-GAAP보다 기업의 경제적 실질가치를 반영하는데 중점을 뒀다. 하지만 자율성을 빌미로 기업들이 껄끄러운 내용은 쏙 빼고 공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 크레딧 시장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IFRS를 조기 도입한 LG화학(051910)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2008년 반기보고서상 4개 카테고리 50개 항목으로 구성됐던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이 IFRS도입 후 올 반기보고서에선 5개 항목으로 90%나 줄었다. 매출채권, 미수금, 선급금 등 해당기간 현금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세부항목은 모두 빠졌다. 기존 K-GAAP상에는 매출채권, 미수금, 미수수익 등 세부 계정별로 변동분을 기재한 반면, IFRS하에서는 매출채권 및 기타채권, 기타 유동자산 등 통합계정을 기준으로 현금흐름표를 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금흐름 분석 애로
한 크레딧 업계 관계자는 “IFRS제도 자체보다는 운영의 문제”라며 “정보공개 범위가 줄어들고, 운전자본 관련 항목들이 뭉뚱그려져서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분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심지어는 기업의 적정 신용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사마저도 관련 분석체계를 바꿨다.
한국신용평가는 기존 K-GAAP상 운전자본 순증을 영업과 직접 관계된 매출채권, 재고자산, 매입채무, 선급금, 선수금 등으로 한정했다. 하지만 IFRS도입 후 장단기금융상품, 투자자산 등 투자활동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것과 퇴직금 관련 자산부채를 제외한 대부분을 포함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는 “일부 조기적용업체 분·반기검토보고서의 경우 영업활동관련 자산부채의 변동에 대한 상세내역을 공시하지 않는 점도 운전자본 순증 범위 변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결국 조기적용업체들이 통합계정을 사용하면서 세부 항목별 분류가 어려워졌고, 연간 결산사업보고서 외에 분·반기보고서 내용이 부실해 신용평가사마저도 운전자본 순증을 두루뭉술하게 포함시켰다는 얘기다.
김 수석 애널리스트는 “향후 순수한 매출채권 또는 매입채무의 순증이 구분 표시될 경우 분석체계를 재변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신평사 분석 틀도 바꿨다
한국기업평가와 한신정평가는 조기도입업체의 경우 현재의 분석틀에 맞춰 일단 재분류하고 있지만 분류기준 변경도 고심중이다. 한기평은 늦어도 11월 중순까지 재무제표 분류양식(부표)을 바꿔 평가할 방침이다. 한기평 측은 “조기도입 기업도 기존 방식(K-GAAP)을 현재까지 일반적 회계기준으로 판단해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며 “IFRS 부표로는 현재 양식을 만족시킬 수 없지만, 최대한 반영되도록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신정평가도 “현재는 1차적으로 피평가대상 회사에 요청해 상세항목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다”며 “향후 기업별, 업종별 특성에 맞게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IFRS 도입이 개별 기업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크레딧 시장과 상충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신평사 전문위원은 “합산기준 연결 재무제표가 기준이 되다 보니 개별사를 들여다보는데 불편함이 있다”며 “IFRS가 정착되면 궁극적으로 개별 재무제표가 안 나올 것으로 예상돼 개별기업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향후 개별 재무제표가 공시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신평사가 직접 비공개로 데이터를 받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공신력을 얻기란 쉽지 않다고도 했다.
또 IFRS 도입자체가 기업의 신용등급에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이더라도 신용평가 재무분석 과정은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신평 측은“기업 본질가치가 변화하지 않더라도 공시기준 재무제표와 재무비율 수치에는 직접적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며 “이런 변화는 투자자들이 특정기업에 가지는 인식, 평판, 투자심리 등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기업의 자금조달능력, 유동성 관리 등에 효과가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공시된 재무지표가 기대 이상으로 악화된 경우 리파이낸싱 리스크가 커지고, 기존 차입금에 대한 약정조건 위반 가능성 등이 내재돼 있다고 밝혔다.
금융당국 '글쎄...'
금융당국은 실질적 시계열성 유지를 위해 영업익의 세부사항 등 일부 정보는 주석에 기재하도록 권고할 방침이다. 하지만 크레딧 시장의 IFRS발 우려에 대해선 아직까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회계제도실 관계자는 “영업익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하는 등 일부 감독당국이 조기도입 상장사에게 권고를 하고 있다”며 “하지만 운전자본 등에 대해선구체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IFRS 자체가 기업에 선택권을 많이 부여해 기업의 경제적 실체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준 측면이 커 비교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이용자들이 불편함을 덜 느끼도록 조기 도입한 기업들의 재무제표에서 미흡한 부분을 체크해 피드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평사 관계자는 “IFRS가 도입되면 자의적 판단력이 더 커져 정보가 확대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문적 분석 능력을 지닌 전문가 집단, 신평사 등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간 80조원의 회사채 자금조달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크레딧 시장 참여자들. 기업들의 편의와 자율성을 위한다는 전제아래 이들에게 IFRS가 독이 되지 않도록 금융당국의 보다 세심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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