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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니 수도 없이 반복했을 말 한가지. "거기서 왜 그런 공을 던져."
결정적인 한방을 얻어맞은 순간 화살은 언제나 포수에게로 향한다. 볼 배합이 잘못됐다는 지적은 야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안주거리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좀 다르다. 포수 조련으로 첫손 꼽히는 조범현 KIA 배터리 코치는 SK 감독시절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좋은 볼배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다. 대화 도중 몇몇이 "어제 볼배합이 이상했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발끈 했던 것이다. 그는 "누구도 맞으려고 볼배합을 하진 않는다. 보여지는 것 만으로 판단해선 안된다"고 말을 맺었다.
얼마 전 김시진 현대 감독도 "볼배합 미스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 제구 실수는 있어도 볼배합 실수는 없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조범현 코치와 비슷한 맥락의 말이었다.
그럼 도대체 볼배합이란 무엇일까. 언제 어떤 공을 던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김동수(현대)와 함께 가장 오랜 세월 안방을 지키며 최고 포수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SK 박경완에게 물어봤다.
▲볼배합의 기본
좋은 볼배합을 묻는 질문에 박경완의 대답은 간단했다. "볼배합에 정답은 없다"고 했다. "변화구 10개를 계속 던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직구 10개를 갈수도 있다. 이때 맞으면 좋은 볼배합이고 맞으면 나쁜 것"이라는것이 그의 답이었다.
볼배합의 옳고 그름을 가늠할 공식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여러가지 상황을 머리속에 넣고 그림을 그려가야 확률적으로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볼배합은 투수의 컨디션과 타자의 컨디션, 경기 흐름 등을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변화구가 잘 되는 날은 변화구 많이 가고 직구가 좋은 날은 그쪽으로 간다. 주자가 있건 없건 노 쓰리(0-3)에서도 직구 컨트롤 안된다 싶으면 변화구로 카운트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박경완은 말을 좀 더 이어갔다. "눈썰미가 중요하다. 포수는 첫째 투수 컨디션 둘째 타자 컨디션 셋째 타자 위치 넷째 타자 움직임을 파악해야 한다. 그 다음은 바람 등 구장 상황, 투수의 구종, 현재 주자 및 경기 상황을 더해 사인을 내야 한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1사 1루 원 스트라이크다. 병살타를 유도해야 한다. 체인지업 던지면 땅볼 무조건 나온다. 그러나 우리 투수가 체인지업이 안된다. 그럼 포기해야 한다. 플라이 아웃을 노리던지 해서 우선 원 아웃 잡는 쪽으로 배합해야 한다. 그걸 땅볼만 생각해서 무리하게 요구하면 투수 밸런스가 무너진다. 이런 것들이 잘 맞아가면 한 게임이 무척 쉽게 간다. 그래도 안되는건 투수에게 다른 문제가 있거나 타자가 워낙 좋거나 둘 중 하나다. 다음 타석에선 다시 배합을 바꿔줘야 한다."
볼 배합에 공식은 없더라도 좋은 리드와 그렇지 않은 리드,다시 말해 좋은 포수와 나쁜 포수를 가르는 기준은 있을거라 여겨졌다. 박경완은 이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좋은 포수란 투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투수가 던져야 시작되는 것이 야구지만 그 투수가 잘 던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포수다. 최대한 볼을 적게 던지면서 아웃 카운트는 많이 잡을 수 있는 리드를 해줘야 좋은 포수다."
그렇다면 반대는? "다시 말하지만 직구를 10개 연속으로 갈 수도 있다. 안 맞으면 좋은 포수라고 하고 맞으면 단순한 포수라고 비난한다. 그것 만으로는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은 이렇다. 직구를 똑같이 10개씩 던지게 했다. 분명 바깥쪽을 원했는데 투수의 공이 가운데로 몰릴 때가 있다. 좋은 포수는 그럴때 조금 비켜 앉아준다. 답답한 포수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왜 원하는 곳으로 공이 오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는 거다. 포수의 타깃(앉은 자리)이 어디냐에 따라 투수의 제구력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투수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어야 좋은 포수다."
▲X자 볼배합의 이유
박경완은 볼배합에 별다른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패턴이 한가지 있다. 몸쪽 높은 곳에 던진 뒤 다음 공으로 바깥쪽을 택하는 배합이 그것이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타자들은 물론 알고 있을 터. 그럼 이런 패턴은 이미 효용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까.
"스피드 있는 투수와 그렇지 않은 투수는 차이가 있다. 빠른볼 투수가 눈에 가깝게 던지면 타자가 일단 놀란다. 맞으면 큰일난다 여긴다. 그것만으로도 몸쪽 공을 일단 던져 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이정도는 피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주게된다. 그렇다고 던져놓지 않으면 안된다. 타자의 눈을 현혹시켜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들에게도 '이때쯤이면 하이볼이 오겠거니' 생각하는 타이밍이 있다. 그런 심리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도 몸쪽 높은 공은 꼭 필요하다.
기본적으로는 몸쪽 높은 볼을 던지고 바깥쪽으로 가면 상대적으로 아주 멀리 보인다. 한번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고의 차이는 크다. 빠졌다 싶은데 미트 보면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조건 적인 배합은 안된다. 타자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엔 그냥 다 속았는데 이젠 아니다. 미리 스탠스를 인사이드로 들어오는 타자들도 있다. 대응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이용해야 한다. '몸쪽 갔다가 바깥쪽'은 그 자체로 위력이 있다기보다는 타자를 생각하게 만든다는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포수는 흔히 야전 사령관으로 불린다. 투수를 포함한 모든 야수들을 지켜보며 경기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할 터. 박경완은 어떤 준비를 하고 그라운드에 나서고 있을까.
그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난 기록지만 보고 나온다." 숫자와 기호로 가득찬 기록지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길래 준비가 그걸로 끝난다는 것일까.
"우리와 했던 이전 3연전,그리고 우리와 붙기 전 3연전을 기억해야 한다. 전부는 아니어도 요소 요소는 기억해둬야 한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좀 허술한 전력분석팀은 A라는 타자가 최근 10타수 5안타를 쳤다는 기록과 함께 "페이스가 좋다"고만 전해온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어떤 투수들에게 쳤는지 봐야 한다. 5할이라면 엄청난 타율이지만 141,2km정도 나오는 투수에겐 쳤지만 145km가 넘는 투수에겐 못 쳤을 수 있다. 또 언더핸드나 좌완 투수에게 약했을 수 있다. 단순히 10타수 5안타라고 피해선 안된다. 그런 점을 기록지로 체크해야 한다.
전력 분석 자료엔 이런 표현도 많다. "바깥쪽 공에 무척 강했다." 그것 역시 기록지로 파악할 수 있다. 우투수가 던지는 바깥쪽과 좌투수가 던지는 바깥쪽은 엄연히 다르다. '우투수에겐 밀어치기로 안타가 됐는데 좌투수에겐 2루 땅볼'이었다면 우리 좌투수가 나올때 바깥쪽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팀과 붙은 기록지를 챙겨야 하는 이유도 있다. 오늘이 그 팀과 15차전이라고 치자. 그런데 7차전쯤때와 같은 상황에 그 타자가 다시 서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 맞은걸로 갈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때 몸쪽 변화구로 맞았다면 오늘은 기본적으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된다. 다시 한번 우리 투수와 상대 타자의 상태 등을 살핀 뒤 결정해야 한다. 포수의 암기력과 두뇌회전이 중요한 이유다."
▲짧은 질문들
-볼 카운트 2-0에서 높은 공으로 빼는 이유는.
"2-0에서 맞으면 투수가 제일 괴롭다. 유리한 카운트지만 그래서 과감한 승부가 어려워진다. 포수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공이라고 할까. 일단 높게 던지며 타자 시야를 흐트러트리고 다음 공을 준비하는 공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좋은 제구가 되는 투수는 그 공으로 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다."
-포수가 타자를 슬쩍 쳐다보는 이유.
"다른 포수들은 모르겠지만 난 솔직히 그냥 버릇이다. 이런 것 까지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나는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갈 때 타자를 보고 체크한다. 분명히 움직임이 다르다. 그 순간을 잘 살피면 노리고 있는 타자들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스퀘어로 서 있다가 갑자기 오픈 되는 선수들 있다. 분명 몸쪽을 노리는 것이다. 그럼 다음에 바꿔가야 한다."
-포수의 자세를 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데.
"아무래도 도루에 신경이 쓰일땐 왼 발이 조금 앞으로 가게 돼 있다. 스퀘어(다리를 일자로 하는 것)로 서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유리하다. 반대로 엉덩이는 조금 들려 있어야 한다. 탄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몸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떨어지는 사인내면 아무래도 엉덩이가 좀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 이럴땐 왼발을 좀 앞으로 해놓으면 잘 안된다. 포수의 자세만 보고 작전을 알 수 있다는 말들도 하는데 요즘은 어떤 자세에서건 여러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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