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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만큼 사연이 많은 땅도 드물다. 이토록 오래 ‘놀려 둔’ 금싸라기 땅도 드물다. 서울 종로구에 ‘송현동 부지’라 불리는 곳 말이다. 경복궁을 마주보고 있고, 한 집 걸러 한 집으로 미술관·화랑인 삼청동·북촌과 연결돼 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인사동이다.
최근 서울시가 ‘공원화’하겠다며 사들여 세간에 오르내리더니, 엊그제부턴 ‘다른 이유’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른바 ‘이건희미술관’이 들어설 후보지로서다. 사실 ‘이건희미술관’조차 “결정된 바 없다”니,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지난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기증품 특별관을 검토하라”란 지시에 이어, 이틀 뒤 문화예술계 원로로 구성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가칭)이 흩어진 이건희컬렉션을 한 곳에 모을 ‘미술관 자리’로 송현동 부지를 ‘콕 찍어’ 제안하며 급물살에 올라탔다.
110여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금싸라기 땅
사실 삼성에게는 첫 선택이 아니었었다. 1995년 홍라희(75)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호암미술관장으로 취임한 뒤 종로 일대에 현대미술관 터를 물색했는데, 운현동 근처(지금의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과 가든타워 사이) 어디쯤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 부지가 미술관 자리로 난항을 겪게 됐고, 새롭게 찾은 데가 ‘송현동 부지’였던 거다. 당시 이건희(1942∼2020) 회장은 프랑스 파리에 ‘루이비통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92)에게 설계의뢰까지 맡겼더랬다.
하지만 ‘삼성미술관’은 그곳에 들어서지 못한다. 1997년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환율이 폭등하자 위약금을 물면서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 당시 계약한 1400억원이 2400억원까지 뛰어올랐으니. 그러자 이번엔 삼성생명이 나서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1년간 각종 규제에 묶여 아무것도 못해보고, 2008년 한진그룹(대한항공)에 팔아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대한항공은 뭘 했나. 한 게 없다. 그나마 성사 근처까지 간 가장 큰 사업은 ‘7성급 한옥호텔과 복합문화단지’. 야심차게 발표했으나 이마저도 ‘학교 주변에 관광숙박시설을 지을 수 없다’는 학교보건법에 막혔다. 대한항공은 행정소송으로 저항했으나 2012년 대법원에서 패소하고 자금난에 직면하자 ‘땅을 매각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송현동 부지에선 24년 동안 잡초만 키운 셈이다.
다음에 나선 타자가 서울시다. 지난해 6월 “이 땅을 매입해 역사문화공원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헐값에 못 넘긴다”고 반발한 대한항공과 팽팽히 맞섰더랬다. 1년여의 실랑이 끝에 지난달 27일 결론이 났다. 국민조정위원회까지 끼어든 조정안은 이렇다. 대한항공이 LH에 이 땅을 팔고, LH는 이 땅을 서울시 사유지 중 ‘어떤 곳’와 맞교환하는 것으로.
“상징성과 현실성 둘 다 갖췄다.” ‘이건희미술관’이 들어설 터로 ‘송현동 부지’를 주장하는 미술계 주장은 이렇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2004)하기도 전, 국내 최대 현대미술관을 짓겠다는 삼성의 꿈이 서린 상징성이 무엇보다 크다고 했다.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지척이고 서울시립공예박물관이 곧 완공된다. 삼청동 화랑가와 북촌 화랑가, 전통의 인사동까지 연결하니 ‘큰 그림’을 완성할 ‘전략적 요충지’로도 딱이라고 한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주무부처인 문체부와 소유주가 된 서울시, 행정을 맡는 종로구청 간에 합의만 이끌어낸다면 삼성에서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며 긍정의 한 표를 던졌다.
‘소나무가 무성한 언덕’이라서 송현(松峴)이라 불린 곳. 일제에 36년, 미국에 52년, 잡초밭으로 24년. 그 112년의 척박한 역사가 운명을 바꾸게 될지 ‘송현동 부지’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