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신구가 연극 ‘안티고네’에 출연한다. 데뷔 51년 만에 희랍 비극에 처음 도전한다(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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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15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극 ‘안티고네’ 리허설 도중 배우들이 2막을 연기하다 순간 얼어붙었다. 크레온 역을 맡은 배우 신구(77)가 무대를 내려가다가 넘어져서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이 선포한 칙령을 어기고 반역자로 몰려 광야에 버려진 오빠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땅에 묻은 뒤 이 문제를 두고 안티고네와 치열하게 언쟁을 벌인 크레온이 무대 밖으로 나가는 상황.
신구는 경사진 무대에서 밖으로 나가는 발판을 헛디뎌 1m 높이 남짓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구가 휘청하며 몸을 수그렸다. 이를 지켜본 한 배우가 걱정돼 신구 쪽으로 다가가자 신구가 팔을 강하게 여러 차례 휘저었다. 연기를 계속하라는 뜻이다.
40여분의 리허설이 끝난 직후 인터뷰 차 만난 신구에게 괜찮냐고 묻자 “괜찮다”는 웃음이 돌아왔다. 되레 “괜히 나 때문에 극 몰입을 방해해 미안한다”고 멋쩍어했다. 신구는 이날 오후 8시 첫 본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데뷔 후 희랍 비극 첫 도전.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이 모험을 ‘축제’로 여겼다. 걱정보다 설렘이 앞선단다. 신구는 “희랍 비극을 못해보고 생을 마감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기회가 와 무리를 해서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배우는 무대 위에서 투혼을 펼쳤다. 신구는 11막 중 7막 이상 무대에 올라 극의 이야기를 이끌었다. 팔순을 앞둔 신구는 무대에서 날을 세웠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의 비극을 그린 연극. 신구가 연기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억압하는 힘의 상징이다. 도시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극, 권위를 지키기 위해 신의 법보다 자신의 세운 법을 강조하는 권력중심형 인물이다. 51년차 배우는 관록으로 크레온에 새 옷을 입혔다. 안티고네를 문책할 때는 강하게 몰아붙였고, 회유할 때는 노회한 정치인의 교묘한 심리전을 여유롭게 표현했다.
드라마 속 자상하기만 한 아버지는 무대에 없었다. “어서 내 운명 중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와서 나를 처리해달라.” 크레온이 아들과 아내마저 잃고 울부짖는 장면 연기는 절절했다. 긴 호흡의 대사도 큰 무리 없이 처리했다. 극 후반 폭발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했으나 캐릭터의 긴장감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신구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 노배우의 열정을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