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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장영환 프로듀서의 축하 문자 메시지에 봉준호 감독은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장 프로듀서는 이데일리에 봉 감독의 반응을 전하며 “시상식 자체보다 봉 감독의 문자 메세지에 더 실감했던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장 프로듀서는 ‘기생충’의 숨은 공신 중 한 명이다. 홍경표 촬영감독, 이하준 미술감독, 정재일 음악감독이 봉 감독과 계속해서 작업을 해온 것과 달리 그는 봉 감독과 작업이 처음이다. 전작이 장준환 감독의 ‘1987’로 원래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함께 하지 못할 뻔 했다가 ‘기생충’ 일정이 늦춰지며 합류할 수 있었다. 장 프로듀서는 ‘1987’에 연이어 ‘기생충’의 작업을 맡으며 지난해와 올해, 영화계의 가장 주목받는 프로듀서가 됐다. 6월 민주 항쟁을 그린 ‘1987’은 지난해 국내 영화 시상식을 휩쓸다시피 했고 빈자와 부자 가족의 대비로 사회 계층 문제를 그린 ‘기생충’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올해 국내외 영화제의 수상 낭보가 기대되고 있다.
“장준환 감독님이 ‘기생충’ 시사회 뒤풀이 때 오셨어요. 장 감독님께 ‘1987’에 ‘기생충’까지 한 것에 대해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더라고요.”
장준환 감독과 봉준호 감독은 조감독 시절을 함께 보낸 각별한 사이다. 장 프로듀서가 상대 감독과 작업하는 것에 대한 각 감독의 반응이 궁금했다.
‘기생충’은 순제작비 135억원의 큰 프로젝트였다. 어느 영화든 그렇지만 영화의 규모가 커질수록 프로듀서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조작된 도시’ ‘1987’ 등 큰 규모의 작품을 한 경험은 ‘기생충’에서 내공을 발했다. ‘기생충’은 날씨 등으로 한, 두 회차 늘어난 것 빼고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계획한 77회차에 맞춰 촬영을 마쳤다. 봉 감독의 손과 발이 된 장 프로듀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작 본인은 봉 감독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철저한 준비 덕에 차질없이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다며 공을 감독에게 돌렸다.
“봉 감독님은 직접 콘티를 그리시니까, 스태프는 그만큼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극중에 기택네 식구가 박사장네 집에서 나와서 비를 맞으면서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이 성북동에서 시작해서 부암동 자하문터널 후암동 창신동 북아현동을 거쳐서 반지하 세트까지 숏들을 다 연결한 거예요. 보통 큰 비(雨) 신은 찍기가 힘듭니다.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주민에게 피해까지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은 비를 뿌리를 범위, 정도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해놓은 봉 감독님의 콘티 덕에 낮에 세팅해놓고 밤에 슛 들어가서 한, 두 시간 만에 촬영을 끝냈어요. 놀라웠죠.”
혹자는 집에서 90% 가량 펼쳐지는 이야기에 100억원을 훌쩍 넘긴 돈을 어디에 썼는지 궁금해한다.
장 프로듀서는 2001년 ‘재밌는 영화’의 제작부 일을 시작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배우나 스태프 등 여러 파트를 관리하고 조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우선시하는 프로듀서의 자질을 꼽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예산에 관한 것인데 능력 있는 프로듀서라 함은 예산을 적게 쓰는 게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라며 “각 파트의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을 조율해서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뽑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장 프로듀서는 ‘기생충’ 작업 후에 영화사 도서관옆스튜디오에 적을 뒀다. 회사에 소속된 몸이지만 영화사 대표의 배려로 프리랜서처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현재는 다음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 프로듀서 지망생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조언이요? 저 오랫동안 일할 수 있게 지망 안 했으면 좋겠는데요. 하하. 농담입니다. 프로듀서는 우연이 많은 직업이에요. ‘이 작품이 하고 싶다’는 바람과 다르게 작업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우연과 우연이 반복되다 보면 원하는 작품과 인연이 맺어지기도 해요. 원하는 작품이 아니어도 낙담하지 말고,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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