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선현의 사상을 받들어 선비를 양성하던 사학이다. 이점에서 과거시험을 목표로 공부하던 향교나 성균관 등의 관학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건축도 절제된 형태로 지어져 선비들이 그 속에서 선현들의 삶과 사상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하였다. 이번에 등재 권고된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9개 서원은 이러한 가치가 잘 보존 관리되고 있고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인정받았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안향 선생을 모시기 위해 그의 고향 순흥(당시 풍기관내)에 세웠다. 초기에는 과거공부에 치중하는 기존의 사설교육장소와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 서원을 인격수양을 목표로 공부하는 진정한 선비를 길러내는 장소로 정착시킨 사람이 퇴계(이황)이다.
퇴계는 백운동서원 건립 후 6년 뒤(1549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잇따른 사화로 존경받는 선비가 내몰리던 당시를 말세라고 여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심이 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선비를 기르는 서원의 창설이 절실한 과제라고 여겨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지정해줄 것을 나라에 간청하여 이듬해 임금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현판)과 함께 토지와 노비, 서책을 하사받았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서원 창설이 잇따르게 되는데 퇴계는 이 운동에도 적극 앞장서 명종 재위 22년 동안 건립된 21개 서원 가운데 10개소의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서원의 취지문(기문)과 규칙(원규)의 작성도 그의 몫이었는데, 이후 거의 모든 서원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퇴계의 서원 창설 운동은 훗날 숙종 때 노론계 학자 삼연 김창흡 선생의 시가 잘 말해주고 있다.
병든 나라를 고치고 백성을 편안케 함이 이에 있다고 했다(醫國安民謂在斯)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4년 뒤(1574년) 도산서당 뒤편에 그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세워지고, 이듬해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사액이 내려졌다. 지금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직접 설계하고 거처하며 제자를 길러냈던 도산서당과 사후에 후학들이 조성한 서원 공간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매우 울림이 있는 공간이다.
필자가 속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는 이러한 유서 깊은 공간에 담긴 퇴계의 정신을 수련생들이 직접 보고 느끼게 하는 한편, 서원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도 50여명의 ‘도산서원 참알기’ 해설 봉사단을 조직하여 그 내용을 널리 알리고 있다. 참다운 인간상을 지닌 착한 사람들을 길러낼 서원의 역할을 소망한 퇴계의 바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더욱 널리 펼쳐질 나날이 기대된다.